자치통감 10
사마광 저, 신동준 역, 올재
권 73, 위기 5 위명제가 사치를 하다
위명제 경초 원년 (237)
6
- 유사가 상주문을 올려 무제 조조의 묘호를 위태조, 문제 조비를 위고조, 명제 조예를 위열조로 정하고 이들 3조의 사당은 만세에 걸쳐 훼손치 못하게 조치할 것을 청했다. 손성이 평했다. “무릇 시호는 제왕의 행적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고 종묘는 제왕의 용모를 현양해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 재위 중에 미리 자신의 시호를 정하고 살아 있을 때 자신을 존현하도록 한 적이 없었다. 위나라의 조정 대신들은 이 문제에 관한 한 올바른 도를 잃었다.”
17
- 노육은 인재와 선거를 논할 때 먼저 품성과 덕행을 따진 뒤에 재능을 말했다. 이풍이 일찍이 그 이유를 묻자 노육이 이같이 답했다. “재능은 좋은 일을 하기 위한 것이오. 그래서 대재는 능히 대선을 이룰 수 있고 소재는 단지 소선을 이룰 수 있을 뿐이오. 지금 어떤 사람이 재능은 있으나 선을 행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곧 그의 재능이 그의 그릇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오.” 이풍이 그 말에 감복했다.
권 74, 위기 6 조상이 패망을 자초하다
위명제 경초 3년 (23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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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정월, 사마의가 경성에 도착해 입궁해 황제를 조견하자 황제가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내가 후사를 군에게 부탁하고자 하니 군은 조상과 함께 나의 어린 아들을 보좌해 주길 바라오. 죽은 것은 가히 받아들일 수 있으나 나는 군을 기다리느라 죽지 않고 있었소. 이제 군을 보니 더 이상 유한이 없소.” 제왕 · 진왕을 불러 앞으로 나아가 사마의의 목을 껴안게 하자 사마의가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을 흘렸다. 이날 제왕을 황태자로 삼은 뒤 황제가 얼마 후 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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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이 이같이 평했다. “장로에게 듣건대 황제는 천자가 출중해 서 있을 때 머리털이 땅까지 닿았다고 한다. 말이 매우 적고 생각이 깊었으며 의지가 강하면서도 과단성이 있었다고 한다. 당초 공경들이 문황제의 유조를 받들어 황제를 보도하자 황제가 그들을 모두 각 지역의 총책임자로 임명한 뒤 국정을 스스로 재결했다. 그는 대신을 예로써 대우하고 능히 선량 · 정직한 사람을 관용했다. 비록 신료들이 극간을 해 군주의 뜻에 거스를지라도 죽이거나 박해한 적이 없었다. 그는 군주로서의 도량이 이처럼 위대했다. 그는 덕행을 행해 기풍을 진작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유성지기에 부주의했다. 대권을 총신에게 위임하게 돼 마침내는 사직을 보호할 길이 없게 됐다.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소릉여공 정시 4년 (243)
11
- 황실의 종친인 조경이 상서해 진언했다. “옛날 제왕이 반드시 동성의 제후를 봉한 것은 현인을 존중하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친친만을 구사하면 점차 쇠약하게 되고 현현만을 구사하면 겁탈의 병폐를 가져옵니다. 성현들은 이를 알고 광범위하게 인재를 구하되 친소를 막론하고 발탁함으로써 능히 국가를 보존하고 오랜 기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위나라는 현인을 존중하는 법은 비록 밝게 돼 있으나 친친의 조치는 아직 완비되지 않아 어떤 자는 비록 임용되어도 중용되지 않고 어떤 자는 한쪽에 아예 버려져 임용조차 되지 않고 있습니다. 신은 가만히 이를 생각하면 침불안석이어서 아는 바를 써 삼가 그 성패를 논하고자 합니다. 옛날 하 · 은 · 주 삼대의 군주는 천하와 더불어 통치했기에 걱정을 같이 했지만 진황은 백성들을 독제해 위망의 시기에 구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 조경이 이 논리로 조상을 깨우치고자 했으나 조상은 이를 받아들일만한 재능이 없었다.
권 75, 위기 7 사마의가 조상을 제거하다
소릉여공 정시 7년 (246)
4
- 당초 제갈량이 살아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그에게 사면이 매우 인색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제갈량이 반박했다. “치세는 원래 큰 덕에 의거해야 하는 것이니 작은 은혜에 기댈 수 없소. 그래서 광형 · 오한은 사면의 실시를 원치 않았던 것이오. 한선제도 말하기를, ‘나도 진원방 · 정강성과 교왕할 때 늘 그들로부터 치란흥망의 도리에 관해 빠짐없이 들었는데 끝내 사면에 관한 얘기는 듣지 못했다’했소. 유경승(유표)과 유계옥(유종) 부자와 같이 해마다 사면해 용서하는 사유를 하면 치국에 무슨 도움이 되겠소?” 촉한의 백성들이 제갈량의 현명을 칭찬하면서 비의가 그를 따르지 못함을 알게 됐다. 진수가 평했다. “제갈량은 치국하면서 여러 차례 군사를 동원했으나 한 번도 가벼이 대사령을 내리지 않았다. 이 어찌 탁견이 아니겠는가?”
소릉여공 가평 3년 (251)
10
- 8월 일, 무양선문후 사마의가 죽었다. 하조해 그의 아들 위장군 사마사를 무군대장군 · 녹상서사에 임명했다.
12
- 남북조시대 남조 동진의 우희가 《지림》에서 이같이 평했다. “무릇 어린 군주를 위탁받는 것은 지중한 일이다. 신하의 신분으로 군주의 권위를 행사하니 지난한 일이기도 하다. 두 가지 책무를 겸해 만기를 총관해야 하니 이를 능히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매우 적다. (…)”
소릉여공 가평 4년 (25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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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4월, 오주 손권이 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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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월, 제갈각을 태부, 등윤을 위장군, 여대를 대사마에 임명했다.
권 76, 위기 8 사마사가 황제를 폐립하다
소릉여공 가평 5년 (253)
3
- (… 사마사가 두 번의 패배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자 …) 습착치가 평했다. “사마대장군이 두 번의 실패를 모두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자 잘못이 해소되고 업적은 오히려 융성해졌으니 가히 명지라고 할 만하다. 만일 실패를 감추고 책임을 남에게 미루며 공로를 자랑하고 실패를 감추기를 시도했다면 상하로부터 신망을 잃고 인재들이 도망가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일국의 군주가 만일 이런 이치로 나라를 다스리면 실수를 하고도 이름을 높이고 전투에 지고 전쟁에 이기는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비록 100번 실패한들 가할 터인데 하물며 두 번 뿐이니 더 이상 말해 무엇 하겠는가?“
4
- 광록대부 장집이 사마사에게 보고했다. “제갈각은 비록 승리했으나 오래지 않아 주살될 것입니다.” 사마사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무슨 이유로 그리된단 말이오?” 장집이 대답했다. “명성이 높아 군주를 두렵게 만들며 공로가 일국을 뒤덮으면서도 죽임을 당하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까?”
권 77, 위기 9 사마소가 반란군을 꺾다
위원제 경원 2년 (261)
3
- 오주가 오관중랑장 설후를 촉한에 사자로 보냈다. 그가 다녀오자 촉한의 정치가 어떠한지를 물었다. 설후가 매우 비판적으로 대답했다. “군주는 혼용해 무엇이 잘못인지를 모르고 신하는 몸을 사려 죄짓기를 피하니 그들의 조정에 들어간 후 정직한 말을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들판을 지나면서 보니 백성들은 모두 굶주려 바짝 말라 있었습니다. 신이 보건대 그들은 바로 연작처당과 유사했습니다. (‘연작처당’은 《춘추좌전》에 나오는 “연소막상”의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연소막상’ 역시 제비가 장막 위에다 집을 짓고도 그 위험을 모르는 것을 지칭한다.) 어미와 새끼 모두 안전하다고 생각해 늘 즐거워하는 바람에 연통에 불이 나고 기둥이 타는데도 느긋한 모습으로 화란이 닥칠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대개 한나라의 상황이 이와 같았습니다.”
권 78, 위기 10 유선이 항복을 청하다
위원제 경원 3년 (262)
4
- 유령은 술을 너무 좋아해 늘 작은 인력거에 앉아 일호주를 차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삽을 들고 따라다니게 했다. 그러고는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어디서든 내가 죽으면 나를 그곳에 묻어라.” 당시의 사대부들은 모두 그를 현자로 생각해 분방한 자세로 통달했다는 취지에서 ‘방달’이라고 칭하면서 다투어 그를 모방하고자 애썼다.
5
- 사마소가 강유가 여러 차례 경내를 침범한 것을 두고 크게 심려하자 말을 모는 시종인 관기 노유가 자객을 촉한으로 들여보낼 것을 제안했다. 종사중랑장 순욱이 반대했다. “명공은 천하를 주재하는 만큼 의당 정의에 입각해 두 마음을 품는 것을 벌해야지 자객을 이용해 적을 제거하는 것은 사해에 법위를 보여 주는 정도가 아닙니다.” 사마소가 기뻐했다. “경의 말이 실로 사리에 맞는 말이오.”
위원제 경원 4년 (263)
8
- 한주가 태자를 비롯한 제왕과 신하 60여 명을 이끌고 몸을 묶고 수레에 널을 실은 항복 의식을 갖춰 등애의 군영 문전으로 나아갔다. 등애가 부절을 든 채 밧줄을 풀고 널을 불태운 뒤 막사 안으로 들게 해 상견했다. 이어 장병들에게 하령해 노략을 금하고, 귀부한 자를 위무하며 옛일을 그대로 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권 79, 진기 1 사마염이 보위를 선양받다
진무제 태시 원년 (265)
6
- 8월 9일, 진문왕 사마소가 죽자 태자 사마염이 계위해 상국•진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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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3일, 위나라 황제 조환이 제위를 진나라에 선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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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주) 위나라는 공식적으로 위문제 조비가 황초 원년인 220년 위나라를 건국한 지 65년만인 태시 원년인 265년에 마침내 망하고 말았다. 실질적으로는 사마사가 조방을 폐하고 조모를 세우는 정원 원년인 254년에 명목뿐인 국가로 전락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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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7일, 진왕 사마염이 황제의 자리에 올라 천하에 대사령을 내리고 연호를 태시로 바꿨다.
진무제 태시 7년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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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에 안락사공 유선이 죽었다.
진무제 태시 8년 (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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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호가 강릉에서 돌아온 후 오직 은덕과 믿음으로 성실히 정책을 펴며 오나라 사람들을 감싸 안았다. 매 교전할 때마다 일자를 정해놓은 뒤 비로소 싸웠고 엄습 등의 궤책을 쓰지 않았다. 제장 중에 궤책을 진언하려는 자가 있으면 곧 그들에게 술을 내려 말을 못하게 했다. 양호는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 경내로 들어가 곡식을 베어 군량에 충당하면서 빼앗은 양만큼 계산해 비단으로 보상했다. 장강과 면수 일대에서 장병들과 수렵할 때에도 늘 오나라 사람들이 쏜 화살을 맞고 진나라 경내로 들어온 짐승을 잡게 되면 이를 모두 오나라로 보내 주었다. 오나라 변경의 인심이 모두 그에게 열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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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호·육항이 두 나라 변경에서 대치할 때 양쪽 사자가 늘 오갔다. 육항이 양호에게 술을 보내면 양호는 이를 마시면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육항이 병이나 양호에게 약을 보내 달라고 청하자 양호가 곧 조제해 보냈다. 육항이 곧바로 복용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말리자 육항이 확신했다. “어찌 양숙자(양호)가 한낱 독약이나 쓸 사람일 수 있겠는가?” 육항이 수비하는 장병들에게 당부했다. “저쪽에서는 오직 덕만을 베풀려고 하는데 이쪽에서는 오로지 힘만을 사용하려 한다면 이는 싸우지 않고도 스스로 굴복하는 길이다. 각자 경계선을 잘 지키면 되는 것이니 결코 작은 이익을 탐할 필요가 없다.” 오주 손호가 이 얘기를 듣고 육항을 책문하자 육항이 권했다. “설령 일읍일향일지라도 신의가 없을 수 없는데 하물며 대국임에야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신이 하지 하지 않으면 오히려 그의 덕행을 널리 현창하게 돼 양호에게 아무런 손상도 줄 수 없게 됩니다.”
권 80, 진기 2 동오 정벌의 계책을 내다
진무제 함녕 5년 (27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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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 손호가 매번 군신들을 연회에 참석시켜 대취하게 했다. 또 황문랑 열 명을 배치해 군신들의 잘못을 적발해 두었다가 연회가 끝난 후에 이를 보고하도록 했다. 만일 오주를 똑바로 주시하거나 언사에 잘못이 있을 경우에는 빠짐 없이 보고했다. 잘못이 거듭된 자는 곧바로 사형에 처하고 경한 자는 죄를 기록해 두었다가 훗날 잘못이 거듭되면 중형에 처하자 어떤 자는 안면 가죽이 베껴지고 또 어떤 자는 눈이 뽑혔다. 상하 관원 할 것 없이 모두 마음이 떠나 국가를 위해 전력을 다하려는 자가 없게 됐다. 진나라의 익주 자사 왕준이 상소했다. “손호의 황음융역이 극에 달했으니 의당 속히 정벌해야 합니다. 만일 손호가 돌연 죽게 돼 현주가 나오게 되면 대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신이 배를 만든 지 이미 7년이나 돼 배가 날마다 부식되고 있습니다. 신의 나이 이미 70세로 죽을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이들 세 가지 조건 가운데 하나만이라도 착오가 생기게 되면 도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간절히 원컨대 폐하는 부디 사기를 놓치지 말길 발랍니다.” 황제가 마침내 오나라 정벌을 결심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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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대규모 군사를 동원해 오나라 정벌에 나섰다.
권 81, 진기 3 천하 통일의 논공을 하다
진무제 태강 원년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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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제가 어느 날 조용히 산기상시 설영에게 손호가 망하게 된 원인을 물었다. 설영이 대답했다. “손호는 소인을 가까이한 데다 형벌을 자의적으로 남발했습니다. 대신과 제장들 모두 자신들을 보전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손호가 망한 원인입니다.”
진무제 태강 9년 (288)
1
- 봄 정월 초하루, 일식이 있었다.
2
- 여름 6월 1일, 일식이 있었다.
3
- 군국 서른세 곳에 큰 가뭄이 있었다.
4
- 가을 8월 14일, 별똥별이 비처럼 쏟아졌다.
5
- 지진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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