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통감 5
사마광 저, 신동준 역, 올재
권 33, 한기 25 태후들이 암투하다
한성제 수화 2년 (BC 7)
2
- (황상이 재해가 일어나는 등 천상의 이변으로 인한 화를 승상 적방진에게 전가하는 책서를 보내자 적방진이 그날 자살했다. 황상은 자살하게 한 사실을 비밀로 하고 승상의 죽음에 대해 극진히 조문했다. 이에 대해) 신 사마광은 평한다. ”(…) 재앙을 신하에게 옮길 수 있는데도 어진 군주는 오히려 차마 그리하지 못했다. 하물며 재앙을 옮길 수 없는 경우이겠는가! 적방진의 죄가 죽을 죄에 이르지 않았는데도 주살해 대변을 감당하게 했다면 이는 하늘을 속인 것이다. 또 적방진이 죽을 죄를 지어 사형을 처해야 함에도 그의 주살을 은폐하고 장례를 후하게 치른 것이라면 이는 백성을 속인 것이다. 효성제는 하늘과 백성을 속이고자 한 까닭에 끝내는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가히 천명을 모른다고 이른 만하다.”
4
- 3월 18일, 황제가 미앙궁에서 재위 26년 만에 46세의 나이로 갑자기 붕어했다. 황제는 평소 강강해 질병이 없었다. (… 평소처럼 잘 지내다) 새벽이 되어 고말(바지와 버선)을 입고 일어나려고 하다가 문득 옷을 떨어뜨리며 말을 하지 못했다.
- 반표가 이같이 찬했다. ”(…) ‘그러나 도중에 주색에 빠지고, 조씨 자매가 궁내를 어지럽히며 왕씨 외척이 조정을 멋대로 하는 천조를 행하도록 허용했다. 가히 사람들로 하여금 흐흑하며 낮게 탄식하는 울음소리를 자아낼 만하다!’라고 했다. 성제의 건시 연간 이래 왕씨 외척이 처음으로 국명을 장악한 상황에서 성제의 뒤를 이은 애제와 평제는 짧게 보위에 오르며 끝났다. 왕망이 마침내 찬위하게 된 배경이다. 왕씨의 위복이 등장하게 된 것은 대개 이처럼 점차 이뤄진 것이다!“
8
- 여름 4월 8일, 태자 유흔이 20세의 나이로 13대 황제인 애제로 즉위한 뒤 시조인 한고제 유방의 사당인 고묘를 배알하고, 황태후를 태황태후, 황후를 황태후로 높였다. 천하에 대사령을 내렸다.
20
- 대조 가양이 상주했다. ”(…) 무릇 땅에 하천이 있는 것은 마치 사람에게 입이 있는 것과 같고, 흙을 이용해 하천을 막는 것은 마치 아이가 우는 것을 그치게 하려고 그 입을 손으로 막는 것과 같습니다. (…) 그래서 말하기를, ‘하천을 잘 다스리는 자는 물꼬를 터서 잘 흐르게 하고, 백성을 잘 다스리는 자는 말문을 터서 말을 잘 하도록 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
권 34, 한기 26 양웅이 상서해 간하다
한애제 건평 4년 (BC 3)
11
- 흉노의 선우가 서신을 올려 5년 1회의 입조에 대한 허락을 청했다. (… 황상이 입조를 허락하지 않는 게 낫다고 하자 …) 황문랑 양웅이 상서해 간했다. “신이 듣건대, 유가의 <<육경>>에서 중시하는 다스림은 난이 일어나기 전에 다스리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병가의 승리는 싸우기 전에 승리하는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 지금 선우가 상소하여 조현을 구하는 상황에서 나라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사양하니, 신의 우견으로는 한나라와 흉노는 이로부터 틈이 생길 것으로 봅니다. (…) 무릇 눈이 밝은 자는 무형에서 보고, 귀가 밝은 자는 무성에서 듣습니다. 실로 아직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미리 손을 쓰면 병혁을 동원하지 않고도 우환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 한 번 틈이 나면 비록 지혜로운 자가 안에서 수고롭게 마음을 쓰고, 변론술이 뛰어난 자가 나라 밖에서 수레바퀴의 교차처럼 바삐 돌아다닐지라도 아직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미리 손을 쓴 것만 못합니다. (…)” 상서가 올라가자 천자가 깨닫고 흉노의 사자를 소환한 뒤 다시 선우의 조현을 허용하는 내용의 서신으로 바꿔 보내도록 했다.
권 35, 한기 27 왕망이 전면에 나서다
한애제 원수 2년 (BC 1)
4
- 6월 26일, 황제가 미양궁에서 스물여섯의 나이로 제위 6년 만에 붕어했다. (…) 즉위 후 누차 주박과 왕가 등의 대신들을 주살하면서 군주의 권위를 강화해 장차 한무제•한선제를 본받고자 했다. 그러나 참소하고 아첨하는 동현과 식부궁 등을 총애하고 믿었다. 이로 인해 충직한 사단과 부희 등은 미움을 받았다. 한나라의 대업은 여기서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다.
- (태황태후가 다시 왕망을 부르고 왕망은 동현을 파직시킨다. 파직당한 동현은 자살한다.)
- 6월 28일, 태황태후가 스스로 왕망을 대사마 • 영상서사로 삼았다.
- (…) 왕망이 상하의 사람을 옆에 끼고 하는 일이 모두 이와 같았다. 당시 왕망에게 부순하는 자는 발탁되고, 오한을 갖는 자는 주멸됐다.
6
- (각주) 현거 : 옛날 70세에 벼슬을 그만두는 치사를 하면 더 이상 조정 출입용 수레를 사용할 일이 없어 벽에 걸어 두는 데서 나온 말로, 통상 70세의 나이를 상징한다.
8
- 9월 1일, 중산왕 유기자가 평제로 즉위했다. (…) 한평제의 나이는 아홉 살이어서 태황태후 왕정군이 임조하고, 대사마 왕망이 실권을 잡았다.
권 36, 한기 28 사술로 보위를 빼앗다
한평제 원시 3년 (3)
3
- (왕망은 자신에게 반기를 든 장남 왕우 조차 죽이고 당시 뱃 속에 있던 손자의 출산을 기다렸다 손자까지 죽였다. 이후 한평제의 어머니 위후를 제외한 위씨 지속을 모두 멸족시켰다.) 군국의 호걸과 한나라의 충직한 신하들로서 왕망에게 붙지 않은 자들은 모두 무고해 죄법으로 죽였다.
한평제 원시 4년 (4)
4
- 2월 7일, 대사도 마궁과 대사공 견풍 등이 승여와 황제용 수레와 의장인 법가를 갖고 안한공 왕망의 집에서 황후(왕망의 딸)를 맞이했다.
6
- 왕망은 태황태후 곁에서 시중드는 궁녀의 우두머리와 일반 궁녀들에게 1000만전의 뇌물을 보내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 또 태황태후의 자매들을 높여 모두 군의 칭호를 내리고, 탕목읍으로 생활하게 했다. 좌우에게 밤낮으로 왕망을 칭송한 배경이다.
7
- (황하 범람에 대한 대책 논의를 보면 …) 또한 유랑으로 먹고살고 직업이 없는 백성에게 일자리도 마련해 줄 수 있습니다. (…)
한평제 원시 5년 (5)
11
- 한평제는 나이를 먹으면서 더욱 건장했다. (…) 겨울 12월, 왕망이 동지 후 세 번째 무일인 납일에 신하들이 군왕을 알현해 인사를 하는 풍속을 이용해 후추를 넣은 술을 헌상하면서 술에 독을 넣었다. 한평제가 중독돼 병이 생겼다.
- 12월 16일, 한평제가 미앙궁에서 붕어했다.
13
- (태황태후는 한선제의 증손들 가운데서 후사를 정하고자 했으나) 왕망은 그들이 장성한 것을 꺼려 이같이 말했다. “형제는 서로 후사가 될 수 없습니다.” 이내 한선제의 현손을 모두 불러 선립하고자 했다.
- (태황태후는 왕망은 의도가 파악했지만) 힘으로 제압할 수 없었던 까닭에 이내 듣고 허락했다.
- (사실상 왕망이 황제가 되었고 태황태후와 제황후를 알현할 때만 신하의 예절을 행하도록 했다.)
한평제 거섭 2년 (7)
3
- (적의와 진풍 등이 10여만 명을 모아 왕망에 반기를 들자) 태황태후가 좌우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인심은 서로 그리 멀지 않다. 내가 비록 부인이기는 하나, 역시 왕망은 반드시 이것으로 인해 스스로 위험에 처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 (하지만 결국 반란은 실패했다)
한평제 초시 원년 (8)
8
- 11월 25일, 왕망이 (…) ”(…) 왕관을 쓰고 진정한 천자의 자리에 올라 새 나라의 이름을 나의 봉지국인 신도국에서 취해 ‘신나라’로 정한다. (…)”
- (태황태후에게 옥새를 받으러 온 왕만의 동생 왕순에게 옥새를 던지며) “나는 이미 늙어서 죽게 됐지만, 이제 너희 형제와 종족이 족멸하리라는 것을 알겠다!”
권 37, 한기 29 헛된 개혁을 실시하다
왕망 시건국 5년 (13)
1
- 봄 2월, 문모태황태후 왕정군이 붕어했다. 나이는 84세였다. (…) 한원제와 합장하면서 중간에 도랑을 내어 서로 분리 시켰다.
왕망 천봉 원년 (14)
9
- 매번 화폐를 바꿀 때마다 백성들은 파산했고, 때때로 이로 인해 형벌에 빠지게 됐다.
권 38, 한기 30 적미적이 횡행하다
왕망 천봉 3년 (16)
2
- 왕망의 신나라가 만든 제도의 번쇄한 모습이 이와 같았다. 세금을 부과하고 계산하는 방법을 정리할 수 없었던 까닭에 관원들은 끝내 봉록을 받을 수 없었다. 각자 자신의 관직을 이용해 간사한 벙법으로 뇌물을 받아 스스로 공급하게 된 이유다.
왕망 지황 3년 (22)
3
- 관동에서 사람들이 허기를 견디지 못해 서로 잡아먹었다.
4
- 차라리 적미를 만났을지언정 / 태사 군사 만나지 않았으면 / 태사 군사 그래도 나을 테니 / 경시 군사 나를 죽일 테니까
- (적미 : 도적, 왕망의 군사와 구별하기 위해 눈썹을 붉게 함)
- (태사와 경시 : 왕망이 도적 토벌을 위해 파견한 장수들)
- 끝내 전황이 예언한 말처럼 된 것이다. (도적은 빈곤에서 기인했으니 먹고 살게 회유하면 되고 군사를 일으키면 오히려 군사로 인한 백성의 피해가 더 클 것이라고 상소)
11
- (한경제 유계의 아들 유발은 유매, 유매는 유웅거와 유외를 낳았다. 유외는 유회를, 유회는 유흠을, 유흠은 유연, 유중, 유수를 낳았다.)
- (유연, 유수가 군사를 크게 일으켰다.)
권 39, 한기 31 경시제와 결별하다
회양왕 경시 원년 (23)
1
- (여러 무리가 모였으나 통일된 지휘체계가 없어 모두들 유씨 가운데 한 사람을 세우고자 했다. 여러 장수들이 유연과 유웅거의 증손인 유현 중 유현을 택했다. 나약한 유현을 세우는 것이 자신들이 방종하기에 좋다고 판단해서다.)
- (이에 대해 유연이 지금 시점에 누가 황제가 되느냐는 중요하지 않고 왕망을 격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해며 흔쾌히 받아 들임)
- 2월 1일, 육수(하남성) 백하의 모래사장 위에 단을 만든 뒤 유현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남면하여 선 자세로 신하들의 조하를 받았다. 부끄럽고 긴장돼 얼굴이 온통 땀투성이였다. 손을 들어올리기는 했으나 말을 할 수 없었다.
7
- (유수가 많은 공을 세우자 제장들이 기뻐하며) “유 장군은 통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시기에는 소적을 보고도 겁을 먹었는데, 지금 대적을 보고도 용간한 모습을 보였으니 심히 기괴한 일이오! 다시 선봉에 서고자 하면 칭컨대 장군을 돕도록 하겠오!“
10
- 제장들이 유연 형제의 위명이 날로 커지자 은밀히 경시제 유현에게 그들을 제거할 것을 권했다.
- (유수가 유연에게 이를 알렸으나 유연이 무시했다.)
- (결국 유현이 유연을 주살했다.)
- (이에 대해 유수는) 오히려 사죄하고 자신의 허물만 거론할 뿐 일찍이 거둔 곤양 전투의 대공을 조금도 내세우지 않았다. 또 친형인 유연을 위한 복상을 하지 않았고, 음식과 언소 역시 평상시와 같았다. 경시제 유현은 이로 인해 부끄럽게 생각하며 유수를 파로대장군에 임명하고 무신후에 봉했다.
11
- 왕망은 군사들이 밖에서 격파되고, 대신들이 안에서 배반하자 믿을 만한 좌우가 없게 됐다. (…) 왕만은 우만으로 인해 음식을 먹지 못한 채 오직 술만 마시고, 전복(복어)만 먹었다. 군사에 대한 책을 읽다가 피곤해지면 궤안에 기댄 채 잠을 청했다. 다시는 베개를 베고 침대에서 편히 잠을 자지 못한 배경이다.
14
- 9월 1일, 연합군의 병사들이 장안성의 동성 북쪽 첫 번째 문인 선평성문을 뚫고 들어갔다.
- 당시 서른두 살인 한평제 유기의 부인이자 왕망의 딸인 황황실주가 탄식했다. “무슨 면목으론 한가의 사람들을 볼 것인가!” 불속으로 몸을 던져 불에 타 죽었다.
- 9월 3일, (…) 상현 출신 두오가 왕망을 죽였다. 교위로 있는 동해 출신 공빈취가 신나라를 세워 15년 동안 재위한 68세 왕망의 머리를 잘랐다. 연합군 군인들이 달려들어 왕망의 몸을 나눠 가졌다. 시체가 마디마디 해체되고 살이 저며졌다. 이를 얻기 위해 서로 다투다가 죽은 자가 수십 명에 달했다.
회양왕 경시 2년 (24)
2
- 경시제가 궁궐의 맨 앞에 있는 전각에 오르자 낭관을 비롯한 관원들이 차례로 궁정에 늘어섰다. 경시제가 부끄러워 안색을 바꾸다가 고개를 숙인 채 자리를 손으로 비비며 감히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
- 경시제 유현이 제장들 가운데 나중에 온 자들에게 물었다. “노략한 게 얼마나 되오?” 당시 좌우의 시종들 모두 궁성에 오래 있던 관원들이었다. 경악한 모습으로 서로를 바라본 이유다.
- 경시제는 조맹의 딸을 맞아들여 부인으로 삼은 까닭에 조맹에게 국정을 맡기게 한 뒤 밤낮으로 후정에서 음연을 했다.
- 조맹은 혼자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면서 생살의 권한을 제멋대로 행사했다.
8
- 5월 1일, (유수가 한단성을 함락시키고 그의 장수 왕패가 왕랑의 목을 베었다.)
- 유수는 왕랑이 사용한 문서를 거둬들여 보지 않고 불태웠다. “이는 왕랑과 내통한 일로 인해 전전반측하는 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안심하게 만들려고 그런 것이다.”
권 40, 한기 32 광무제가 즉위하다
한광무제 건무 원년 (25)
6
- 6월 22일, 소왕 유수가 호현의 남쪽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14
- (광무제가 탁무라는 어진 늙은 관리를 등용하자) 신 사마광은 평한다. ”(…) 유독 광무제만이 충후지신을 취하고, 선량한 관원을 표창하고, 미미한 민간 신분 중에서 인재를 발탁해 군공의 우두머리에 앉힐 수 있었다. 광무제가 옛 한나라 왕실인 구물을 광복해 장구하게 왕조를 유지하도록 만든 배경이다. 대략 먼저 힘써야 할 요긴한 일을 깊이 알아 그 본원을 얻은 덕분이라고 하겠다.”
15
- 광무제 유수의 제장들이 낙양을 포위한지 몇 달이 지났으나, 주유가 튼튼하게 지킨 까닭에 함락시키지 못한 것이다. (주유는 과거 유수의 형 유연을 죽일 것을 모의했고, 유수를 북벌에 내세우지 못하게 경시제에게 간한 이유로 두려워 항복하지 못 헀는데) 광무제가 말했다. “대사를 거행하는 자는 작은 원한을 꺼리지 않는 법이오 (…)”
- 9월 26일, 주유가 항복의 표시로 손을 묶는 면박을 한 채 광무제에게 갔다. 광무제 유수가 그의 면박을 풀어 준 뒤 소견했다. (…) 주유를 평적장군으로 삼고 부구후에 봉했다. 그는 이후 궁중 물품의 조달 책임자가 됐고, 책봉된 작위는 여러 대에 걸쳐 전해졌다.
- 겨울 10월 10일, 광무제 유수의 거가가 낙양으로 들어가 남궁으로 갔다. 드디어 낙양을 도읍으로 정했다.
22
- 장앙 등이 사록으로 하여금 유현을 목매달아 죽이도록 했다. 유공이 밤에 그곳으로 가서 그의 시체를 거둬 감춰 두었다. 광무제 유수가 등우에게 조서를 내려 한무제의 능이 있는 패릉 주변에 장사 지내게 했다.
한광무제 건무 2년 (26)
10
- (과부가 된 광무제의 누이 호양공주가 송홍에 관심을 보이자 광무제가 호양공주를 병풍 뒤에 앉혀놓고 송홍을 불렀다.) “귀하게 되면 사귀던 친구를 바꾸고 부유하게 되면 아내를 바꾼다는 취지의 ‘귀역교, 부역처’ 속담이 있소. 이를 인정이라 할 수 있소?” 이미 결혼한 송홍이 이같이 대답했다. “빈천할 때 알던 친구는 잊을 수 없고, 술지게미를 같이 먹으며 고생을 한 처는 당 아래로 내려보내지 않는다는 취지의 ‘빈천지지불가망, 조강지처불하당’ 구절을 신이 들은 바가 있습니다.” 광무제가 공주를 돌아보고 말했다. “일이 잘 안 될 듯하다!“
35
- (광무제가 적미를 토벌하러 간 등우를 불러들이며) ”(…) 적미는 먹을 양식이 없어지면 스스로 마땅히 동쪽으로 올 것이오. 나는 배불리 먹인 군사로 긂주린 적을 상대하고, 휴식을 취해 정비된 군사로 피로에 지친 적을 상대하는 계책으로 임할 것이오. 그러면 짧은 지팡이로도 능히 적을 제압할 수 있으니 제장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소. (…)” (역자 주 : 손자병법 군쟁에 나오는 계책이다. 이근대원, 이일대로, 이포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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