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통감 6
사마광 저, 신동준 역, 올재
권 41, 한기 33 군벌들이 저항하다
권 42, 한기 34 공손술을 토벌하다
한광무제 건무 6년 (30)
6
- 광무제가 외효에게 조서를 내려 천수에서 남하해 서촉을 치게 했다. 외효가 상언했다. “백수는 험하고 막혀 있고, 잔각은 크게 낡아 끊어져 있습니다. 공손술은 성정이 엄하고 모질어 상하가 서로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 죄악이 완전히 드러날 때를 기다렸다가 치도록 하십시오. 이는 이내 사방에서 향응하는 세력을 크게 불러들일 것입니다.” 광무제는 외효가 끝내 써먹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이내 토벌을 모의했다.
한광무제 건무 9년 (33)
9
- (음흥이 황제의 호의를 고사하며 누나 음귀인에게) “무릇 외척이 끝내 고통 받는 것은 사양하고 물러나기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딸을 후왕의 배필로 삼고, 공주를 며느리로 삼기 위해 곁눈질하는 것은 어리석은 저의 마음으로 볼 때 실로 불안하기만 합니다. 부귀는 끝이 있는 것으로 사람은 마땅히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겉만 화려하고 사치한 것은 보고 듣는 당사자인 세상 사람들에게 말로 놀리는 대상이 될 뿐입니다.”
한광무제 건무 11년 (35)
7
- (공손술의 패색이 짙어지고 신하들이 항목을 권하자) “폐흥은 천명이다. 어찌 항복하는 천자가 있을 수 있는가.”
11
- 12월, 오한이 이릉에서 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공손술을 토벌했다.
권 43, 한기 35 공신들을 배제시키다
한광무제 건무 12년 (3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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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한이 공손술의 군사가 밥을 먹지 못해 피로한 틈을 타 호군 고호와 당한에게 명해 예졸 수만 명을 이끌고 나가 적을 공격하게 했다. (…) 고오가 적진 속으로 달려 들어가 공손술을 찔렀다. (…) 공손술이 병사를 연잠에게 소속시킨 뒤 그날 밤 숨을 거뒀다. 다음 날 아침 연잠이 성을 들어 항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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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1일, 오한이 공손술 처자의 목을 베고, 공손씨를 모두 멸망시켰다. 이어 연잠의 일족도 모두 죽인 뒤 병사들을 풀어 대략하게 하면서 공손술의 궁실을 불태웠다. 광무제가 이 소식을 듣고는 화를 내며 오한을 나무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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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공손술은 이업을 불러들여 박사로 삼고자 했는데 이업이 병을 핑계로 계속 고사했다. 그래서 대홍려 윤융에게 명해 조서를 내렸다.) “바야흐로 지금 천하는 나뉘어 있는데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어찌 알아 작은 몸으로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연못을 탐사할 수 있겠소! (…) 사시마다 진귀한 음식과 일용품을 보내 그대를 잊지 못하는 뜻을 전했소. 마땅히 위로는 자신을 알아주는 지기를 받들면서 아래로는 자손을 위해 일하는 식으로 신명을 모두 온전히 하는게 좋지 않겠소!” 이업이 탄식했다. “공자는 <<논어>>에서 말하기를, ‘**위태로운 나라에는 발을 들여놓지 말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살지 않는다’**라고 했소. (…) 또 말하기를, **‘군자는 위험을 보고 목숨을 바쳐야 한다’**라고 했소. 어찌하여 높은 자리와 많은 음식으로 유혹하려 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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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공손술은 협박을 통해 인재를 얻으려고 했고, 그들은 죽음을 불사하고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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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는 촉 땅을 모두 평정한 뒤 공손술의 징소를 피한 인재를 등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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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는 공손술의 장수로 있던 정오와 이육에게 재간이 있능 것을 보고 모두 뽑아 썼다. 촉 땅인 서토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며, 귀심하지 않은 자가 없었던 이유다.
11
- (광무제가 임연을 태수로 임명한 뒤) “상관을 잘 섬기고, 명예를 잃지 않도록 하라.” 임연이 대답했다. “신은 전에 ‘충신은 불화하고, 화신은 불충한다’라는 얘기를 들으 바 있습니다. 바르게 행동하며 공정하게 법을 지키는 것이 신자의 절조입니다. 상하가 뇌동하면 폐하의 복이 될 수 없습니다. 폐하는 신에게 상관을 잘 섬기기를 당부했으나 신은 감히 그 조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 광무제가 탄식했다. “경의 말이 옳소!”
한광무제 건무 19년 (43)
6
- 곽후가 폐위된 후 곽후 소생의 태자 유강이 내심 불안해했다. 질운이 태자에게 유세했다. “의심을 받는 자리에 오래 머물면 위로는 효도에 어긋나고, 아래로는 위태롭게 됩니다. 태자의 자리를 사양하고 모친을 봉양하느니만 못합니다.” 태자 유강이 이를 좇았다.
- (광무제가 차마 이를 승인하지 못하고 몇 년 동안 대답을 늦추다 6월 26일 마침내 조서를 내려 음후의 아들 동해왕 유양을 이름을 유장으로 고쳐 황태자로 삼고 유강을 동해왕으로 삼았다.)
- 사가 원굉이 <<후한기>>에서 이와 같이 논했다 ”(…) 동해왕으로 간 유강은 겸공의 마음으로 더욱 사리에 밝았고, 대통을 이어 한명제로 즉위한 유장 또한 더욱 우애를 돈독히 했다. 비록 장유가 뒤바뀌어 두 사람의 흥폐는 달라졌으나, 부자형제 간의 원래 효우에는 전혀 변한 게 없었다. 무릇 하•은•주 삼대의 다스리는 도리일지라도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었겠는가!”
한광무제 건무 20년 (44)
3
- 5월 4일, 광평충후 오한이 훙거했다. (…) 오한은 성정이 강강하고 힘이 넘쳤다. (…) 제장들이 전쟁에서 불리한 것을 보고 혹여 두려워하거나 상도를 잃을 때마다 의기가 놀라지 않고 침착했다. (…) 매번 출정할 때마다 아침에 조서를 받으면 저녁에 길을 떠났고, 잠시도 행장을 꾸리는 일로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다. 조정에 들어와 있을 때도 사물을 자세히 살피고 삼가며 질박한 자세를 체모에서 드러냈다. (…) 자신의 임직을 다하고, 공명을 끝까지 누릴 수 있었던 이유다.
한광무제 건무 22년 (46)
4
- 유곤이 강릉 현령으로 있었다. 강릉현에 화재가 일어나자 유곤이 불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자 불이 곧바로 꺼졌다. 이후 그가 홍농 태수가 되자 호랑이가 모두 새끼를 업고 황하를 건넜다. (광무제가 이 소식을 듣고 유곤을 징소하여 어떤 덕정을 베풀었기에 이런 일이 있게 되었는지 물었는데 유곤이 대답하길) “우연일 뿐입니다.” 좌우가 모두 웃었다. 광무제가 탄복했다. “이는 바로 장자의 말이다.” 사관을 돌아보며 이를 사책에 기록하게 했다.
권 44, 한기 36 도참설을 과신하다
한광무제 중원 원년 (56)
8
- (광무제는) 늘 스스로 덕이 없다고 겸양하면서 군국에서 올리는 내용을 번번이 억누르며 감당하려고 하지 않았다. 사관의 기록이 적었던 이유다.
한광무제 중원 2년 (57)
2
- 2월 5일, 광무제가 남궁의 전전에서 붕어했다. 향년 62세였다.
- 광무제는 날마다 아침 조회를 열어 살폈고, 해가 서쪽으로 기우는 일측의 때가 돼야 이내 파했다. 자주 공경과 낭장들을 불러 경학과 사물의 이치를 강론하고, 밤이 돼서야 이내 잠자리에 들었다. (… 즐겁게 지내며 편히 쉬라는 황태자 유장의 간언에) 광무제가 대답했다. “나는 이런 일을 스스로 즐기는 까닭에 걸코 피로하지 않다!”
- 정사를 밝고 신중하게 다루고, 권력의 기강을 총체적으로 관리하며, 때를 보고 힘을 헤아리고, 일을 행하면서 허물이 없도록 했다. 그의 시대에 전한 때의 뛰어난 공적을 회복하고, 몸소 태평한 시대를 이룬 배경이다.
3
- 황태자 유장이 서른 살의 나이로 보위에 올랐다. 황후 음려화를 높여 황태후로 칭했다.
권 45, 한기 37 수성에 성공하다
한명제 영평 8년 (65)
6
- 당초 황제는 서역에 신이 있고, 이름이 불 즉 부처라는 말을 들었다. 곧 사자를 천축으로 보내 그 도를 구하고, 책과 도를 닦은 사문을 얻어 오게 했다. 그 책은 대개 허무를 종지로 삼고, 자비와 불살을 귀하게 여겼다. 사람이 죽어도 정신이 불멸한 상태로 있다가 다시 형체인 몸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살아 있을 때 행한 선악은 반드시 그에 따른 보응이 있기에 귀하게 생각한 것은 정신의 수련이었다. 그 궁극은 깨달은 자인 부처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 중국에 처음으로 그 술법이 전해진 배경이다.
한명제 영평 14년 (71)
2
- 당초 번조의 동생 번유가 아들 번상을 위해 초왕 유영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이고자 했다. 번조가 이 얘기를 듣고 중지시켰다. ”(…) 당시 특진으로 있던 부친 번굉이 한마디하시기를, ‘**딸은 왕에게 시집보낼 수 있고, 아들은 공주를 아내로 모실 수 있다. 다만 귀충이 지나치게 성대해지면 바로 화환이 된다. 그러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라고 했다. 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어찌 초나라에 버리려고 하는 것인가!”
- 번유가 좇지 않았다. 초왕 유영의 사건(모반)이 발각됐을 때 번조는 이미 죽고 없었다. 황상은 번조의 근각한 행동을 추념해 그의 여러 아들을 이 사건에 연루시키지 않았다.
한명제 영평 18년 (75)
5
- 8월 6일, 황제가 동궁의 전전에서 붕어했다. 향년 48세였다. (…) 황제는 건무 황제가 만든 제도를 높이 받들면서 바꾼 것이 없었다.
6
- 한면제 유장의 태자인 한장제 유달은 즉위했을 때 열여덟 살이었다.
권 46, 한기 38 반초가 서역을 열다
한장제 건초 2년 (77)
4
- 황상이 여러 외숙에게 작위를 내리고자 했으나 마태후가 허락하지 않았다. (황제가 거듭 청하자 태후가) ”(…) 옛날 한경제 때 두태후가 왕황후의 오라버니에게 작위를 내리려고 하자 승상 조후 주아부가 말하기를 ‘**고조는 약속하기를 군공이 없으면 봉후할 수 없다’**라고 했소. (…) 만일 음양이 조화를 이루고, 변경이 맑고 깨끗해지면 그러한 뒤에 아들의 뜻대로 시행하도록 하시오. (…)”
한장제 건초 8년 (83)
5
- (황제가 두헌의 잘못을 알고도 벌하지 않음에 대해) 신 사마광은 평한다. “인신의 죄 가운데 군주를 속이는 기망보다 더 큰 것은 없다. 명군이 이를 질시하는 이유다. (…) 만일 혹여 알고도 다시 용서하면 이는 알지 못하는 것만도 못한 일이다. (…) 저들은 간악한 행동을 한 뒤 윗사람이 이를 알지 못하면 오히려 두려워하는 바가 있다. 그러나 이미 알고도 벌을 내리지 않으면 저들은 두려워할 게 없다는 것을 알고는 방종하며 뒤를 돌아보는게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선한 사람인 것을 알고도 등용하지 않고, 악한 사람인 것을 알고도 내치지 않는 군주가 깊이 경계해야 할 점이다.”
한장제 원화 원년 (84)
11
- (모의와 정균이 행의 덕분에 칭송이 자자하자 장봉이 모의의 명성을 우러러 찾아갔는데, 그 때 모의를 현령에 임명한다는 격문이 왔다.) 모의가 격문을 잡고 안으로 들어올 때 기쁨에 겨워 얼굴빛이 바뀌었다. 장봉은 이를 천하게 여겨 이내 인사를 한 뒤 떠났다. 이후 모의는 모친이 죽은 뒤 황제가 징소를 하든 지방관이 벽소를 하든 일절 응하지 않았다. 장봉이 이내 자신의 경솔한 행동을 후회하며 이같이 감탄했다. “현자는 실로 불가측이다. 전에 기뻐했던 것은 모친을 위해 몸을 굽힌 것이로구나!”
권 47, 한기 39 두씨 외척이 전횡하다
한장제 원화 3년 (86)
4
- 사공 제오륜이 걸신을 했다. (제오륜은 …) 공직에 있는 동안 정숙하고 결백했다는 칭송을 들었다. 혹자가 제오륜에게 이같이 물은 적이 있다. “공은 사사로움이 없습니까?” 제오륜이 이같이 대답했다. “옛날 어떤 사람이 나에게 천리마를 보내온 일이 있소. 나는 비록 받지 않았으나 삼공이 사람을 뽑을 때마다 이 사람을 잊을 수가 없었소. 끝내 그 사람을 채용하지는 않았소. 이런 일이라면 어찌 사사로움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소!“
10
- 황제가 말했다. “속언에 이르기를, ‘길가에 집을 지으면 3년이 걸려도 완성하지 못한다’라고 했소. 예의에 일가견이 있는 자들을 모아 놓으면 명분상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여러 얘기를 그러모은 뒤 서로 의심하며 이론을 제기하는 탓에 글을 써 내려가는 일이 불가능할 것이오. 옛날 요임금은 악곡인 <대장>을 만들 때 단 한 명의 악관인 기만으로도 충분했소.”
한장제 장화 2년 (88)
2
- 1월 29일, 황제가 장덕전전에서 붕어했다. 향년 31세였다.
- 태자인 유조가 한화제로 즉위했다. 나이는 열 살이었다. 황후 두씨를 황태후로 높였다.
권 48, 한기 40 음황후가 폐위되다
한화제 영원 4년 (92)
8
- (<<한서>>를 지은 바 있는 반고가 완성하기 전에 옥중에서 죽었다. <<후한서>>를 고쳐 쓴 바 있는 화교가 이를 논했다.) “반고는 역사를 서술하면서 사실을 드러내거나 깎아내리지 않았고, 사실을 물리치거나 억지로 끌어다 쓰지 않았다. 풍부하게 많은 것을 기록했으나 난잡하지 않고, 상세하면서도 체계가 있는 것이 자랑이었다. (…)“
10
- 황제는 환관 정중을 황후궁을 관리하는 대장추로 승진시켰다. 황제가 공훈을 기록하고 상을 내릴 때마다 정중은 늘 여러 번 사양하면서 조금만 받았다. 황제는 이런 일로 인해 그를 현명하다고 생각해 늘 그와 함께 정사를 의논했다. 환관이 권력을 사용하게 된 것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한화제 영원 14년 (102)
7
- (반초가 후임인 임상에게) ”(…) 지금 그대의 성정은 엄급하오. 물이 맑으면 대어가 없소. 자세히 살피는 정사는 아래와 화목할 수 없소. 마땅히 호탕하고 편안하고, 간명하고 쉬운 모습을 보이도록 하시오. 작은 과실을 관대히 처리하고, 대강의 일만 챙기면 될 것이오.” 반초가 가자 임상이 친한 자에게 말했다. “나는 반군이 당연히 기책을 일러 줄 것으로 생각했소. 지금 말하는 것을 보니 평평할 뿐이오.” 임상은 뒤에 가서 끝내 변경의 화평한 상태를 잃고 말았다. 반초가 우려한 것처럼 된 셈이다.
8
- 겨울 10월 24일, 조서를 내려 귀인 등씨를 세워 황후로 삼았다. 황후가 사양하다 부득이해 즉위했다.
한화제 원흥 원년 (105)
4
- 겨울 12월 22일, 황제가 장덕전전에서 27세의 나이로 붕어했다. 당초 황제가 황자를 잃은 것이 앞뒤로 10여 명이었다. 나중에는 태어나는 황자를 번번이 숨겨 비밀로 하여 민간에서 양육한 이유다. (…) 소자 유릉을 출생한 지 100여 일밖에 지나지 않았으나 영립하여 황태자로 삼았다가 이날 저녁 보위에 즉위시켰다. 황후를 높여 황태후로 삼자 등태후가 임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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