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통감 7
사마광 저, 신동준 역, 올재
권 49, 한기 41 강족이 대거 침공하다
한상제 연평 원년 (106)
16
- 8월 6일, 황제가 붕어했다(당시 나이는 2세).
- 청하왕의 아들 유호를 영접해 숭덕전에서 재계하게 했다. (…) 이내 조서를 내려 유호를 효화황제의 후사로 삼고, 책명도 만들었다. 유호가 황제의 자리로 나아갔다. 태후가 여전히 임조하여 청정을 했다.
한안제 영초 2년 (108)
3
- 여름, 가뭄이 들었다. 5월 1일, 등태후가 낙양에 있는 관청과 소부 소속의 약로옥에 행차해 죄수들을 조사했다. (살인하지 않았는데 고문으로 거짓 자백한 죄수의 몸짓으로 억울함을 눈치채고) 곧바로 정황을 물어 억울한 실상을 모두 알 수 있었다. 즉시 낙양현령을 불러 잡은 뒤 옥에 가두고 죄를 내렸다. 황궁으로 가는 도중 단비가 크게 내렸다.
권 50, 한기 42 유모가 정사에 개입하다
한안제 원초 6년 (119)
9
- 등태후가 한화제의 동생인 제북왕 유수 및 하간왕 유개의 자녀 가운데 다섯 살 이상의 남녀 40여 명과 자신과 가까운 등씨 자손 30여 명을 불러 모았다. 이어 나란히 도성에 마련한 제후의 저택을 열게한 뒤 경서를 교학하게 하면서 몸소 시험을 감독했다. (…) “말세에 귀척 가운데 식록을 받는 자들은 온의미반을 누리며 견고한 수레를 타고 좋은 말을 부리거나, 담장을 마주하며 학술을 하고 있다. 이처럼 좋고 나쁜 장부를 식별하지 못하는 까닭에 재앙과 낭패가 따라오는 것이다.”
한안제 건광 원년 (121)
3
- 3월 13일, 등태후가 붕어했다.
9
- (대사농 주총이 등씨 일가가 아무런 죄도 없이 화를 만난 것을 애통히 여겨 죽음을 각오하고 상소했다.) “엎드려 생각건대 화희황후인 등황후의 성선의 미덕은 주문왕의 모친인 태사를 닮은 한나라 시대의 문모입니다. 형제는 충효하고, 한마음으로 나라를 걱정했습니다. 종묘사직에 주인이 있게 되고, 왕실이 의지한 이유입니다. 이들은 공을 이루자 몸을 뒤로 물리고, 봉국을 양보하고 지위를 겸손히 했습니다. 역대의 외척 가운데 이들과 비교할 자가 없습니다. 마땅히 선행을 쌓고 겸손을 행해 복을 향유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변칙적으로 궁인의 편파적인 말 한마디로 함정에 빠진 나머지 날카로운 혀와 뾰족한 입에 의해 위험한 지경으로 기울게 됐습니다. (…)”
권 51, 43 어린 황제가 즉위하다
한안제 연광 4년 (125)
4
- 3월 8일, 황제가 남순 중에 승여에서 붕어했다. 나이는 32세였다.
- (황후와 염현 형제, 강경, 번풍 등이 황제의 시신이 길에 있고 폐세자인 제음왕 유보가 궐내에 있어 자신들에게 피해가 될까 두려워 ‘황제의 질환이 심하다’라고 말한 뒤 영구를 와거로 옮기고 이르는 곳마다 음식을 올리고 문안 인사를 하며 돌아왔다. 4일 만인 3월 13일에 환궁할 수 있었다.)
- 3월 14일, 저녁 발상했다. 황후를 높여 황태후로 했다. 태후가 임조했다. 염태후는 오래도록 국정을 전횡하고자 유년의 어린아이를 옹립하려 욕심을 냈다. (…) 제북혜왕 유수의 아들인 북향후 유의를 맞이해 후사로 삼았다. 제음왕 유보는 궁에서 폐출됐다.
- 3월 28일, 북향후 유의가 소제로 즉위했다.
13
- 소제인 북향후 유의의 병이 위독했다.
- 10월 27일, 북향후가 훙거했다.
- (염태후 측은 발상하지 않도록 했고, 손정 등은 제음왕 유보를 황제로 세우고자 싸워서 손정 측이 이겼다.) 제음왕을 맞아들여 즉위하게 했다. 이때 그의 나이 열한 살이었다.
한안제 영건 2년 (127)
3
- 1월 19일, 황태후 염씨가 붕어했다.
한안제 영건 6년 (131)
6
- 황제가 황후를 세우고자 했다. 귀인 중 총애하는 자가 네 명이나 있어 누구를 세워야 할지 몰랐다. 의논 끝에 신령 앞 에서 탐주(추첨)를 하여 신령이 정하는 대로 했다. (이에 대해 호광과 곽건, 사창이 상소해 간했다) ”(…) 마땅히 양가를 간택에 참여시켜 덕이 있는 지 찾아보고, 덕이 같으면 나이를 갖고 비교하고, 나이가 같으면 용모로 가리면 됩니다. 경전의 가르침을 생각한 뒤 성려로 결단하기 바랍니다.” 황제가 이를 좇았다.
권 52, 44 외척 양기가 날뛰다
한순제 영화 4년 (139)
1
- (황제의 양상에 대한 총애가 커지자 중상시 장규 등이 모의해서 양상을 제거하고자 했는데 실패해서 결국 장규 등이 주살됐다.) 양상은 많은 사람이 누명을 써 억울한 일을 당할 것을 두려워해 이내 항소했다. “«춘추»의 대의에 따르면 공로는 원수에게 돌리고, 죄는 원흉인 수악을 추궁하는 데 그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대옥이 한 번 일어나면 허물이 없는데도 무고한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사죄 혐의를 받는 죄수가 오랫동안 구금되어 있으면 작은 일도 크게 번집니다. 이는 화기를 순영하는 데 어긋나고, 정사를 평화롭게 펼쳐 교화를 이루는 방안도 아닙니다. 마땅히 속히 일을 매듭지어 체포하는 번거로움을 그치도록 하십시오.” 황제가 이를 받아들였다.
한순제 영화 6년 (141)
8
- 양상이 병이 위독해지자 아들 양기 등을 타이르며 말했다. “나는 살아서 조정에 보탬이 되게 하지 못했다. 죽어서 어찌 나라의 재화를 소비할 수 있겠는가! (시신의 입에 넣는 쌀, 옥으로 된 함 등을) 마땅히 모두 사양한다.”
- 8월 4일, 양상이 훙거했다. 황제가 친히 임상했다. 여러 아들이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했으나 조정에서 듣지 않고, (황제의 붕어 때 사용하는 물품들을 내렸다. 중궁이 친히 영구를 전송하고,) 황제가 선양정까지 가서 운구하며 호위하는 거기를 멀리서 바라봤다.
- 8월 10일, (양상의 아들) 양기를 대장군, 양기의 동생인 양불의를 하남윤으로 삼았다. 신 사마광은 평한다. “한성제는 현준을 선임하지 못하고 외가에 정사를 위임했다. 가히 암우했다고 말할 수 있으나 오히려 왕립이 인물이 아님을 알고 버린 채 등용하지 않있다. 한순제는 대병을 후족에게 내주었다. 양기가 매우 우매하고 간사하며 흉악하고 잔학한 인물인 것이 평소에도 잘 드러났는데도 그에게 부친의 지위를 이어받게 했다. 끝내 패역을 저질러 한실을 뒤집고 말았다. 한성제와 비교해 암우한 점에서 누가 더 심한가!”
한순제 건강 원년 (144)
5
- 8월 6일, 황제가 향년 30세의 나이로 옥당전전에서 붕어했다. 태자가 즉위할 때 나이는 두 살이었다.
한충제 영가 원년 (145)
1
- 봄 정월 6일, 즉위 다섯 달 만에 세 살의 어린 황제 충제가 옥당의 전전에서 붕어했다.
- (양기가 양태후와 계책을 논의해 발해 효왕 유홍의 아들 유찬을 건평후에 봉하고) 그날로 황제에 즉위했다. 당시 그의 나이 여덟 살이었다.
권 53, 45 최식이 <<정론>>을 쓰다
한질제 본초 원년 (146)
5
- 황제가 어렸지만 총명하고 지혜로운 모습을 보였다. 일찍이 조회에서 양기를 쏘아보며 이같이 말했다. “이 사람이 발호장군(높고 낮은 것을 밟거나 뛰어넘는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제도를 멋대로 운용하는 것을 가리킨다.)이군!” 양기가 이 말을 듣고는 아주 싫어했다.
- (윤6월 1일, 양기가 황제를 독살했다.)
- (이고를 포함한 수많은 대신들이 원하는 청하왕 유산 대신 양기와 환관들이 원하는 유지를 황제로 세우기 위해 양기가 태후를 설득해 이고를 먼저 면직시키고 유지를 황제로 즉위시켰다.)
- 당시 유지의 나이는 열다섯 살이었다. 양태후가 여전히 임조청정을 했다.
한환제 화평 원년 (150)
2
- 1월 2일, 양태후가 조서를 내려 황제에게 대정을 돌려주고, 비로소 황제를 대신해 천하 대사를 처리하는 칭제를 폐지했다.
- 2월 22일, 양태후가 붕어했다.
4
- 양기는 손수(양기의 처)와 더불어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집을 지으며 토목공사를 끝까지 크게 일으켜 서로 다투듯 경쟁했다. (…) 흙을 파서 산을 쌓고, 10리에 걸쳐 아홉 개의 산등성이를 만들고, 심림의 계곡 사이로 떨어지는 시내를 조성해 마치 자연적으로 된 것처럼 만들었다. 그 안에 기이한 날짐승과 길들인 들짐승이 날고 뛰도록 했다. (…)
한환제 원가 원년 (151)
10
- 백관에게 조서를 내려 뛰어난 행보를 보이는 독행지사를 천거하게 헸다. 탁군에서 최식을 천거해 낙양의 궁문 관리처인 공거서에 이르게 했다. 최식이 병을 핑계로 대책에 응하지 않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세사를 논한 저서 «정론»을 펴냈다.
- 그는 정론에서 이같이 설파했다. ”(…) 대개 나라를 다스리는 법도 몸을 다스리는 것과 같아 평소에 잘 보양하고, 병이 들면 약을 써야 한다. 무릇 형벌은 난세를 다스리는 약과 침술이고, 덕교는 태평찬하를 일으키는 흥평의 양육(곡식과 고기)이다. 덕교를 베풀어 잔악한 자를 제거하는 것은 맛있는 고기를 갖고 병을 치료하고자 하는 것과 같다. 형벌로 치평을 이루고자 하는 것은 약석을 갖고 영양을 취하고자 하는 것과 같다. 바야흐로 지금 백왕의 정치 폐습을 이어받아 액운의 시기에 처해 있는데도 몇 세대에 걸쳐 정치적으로 은혜를 베푸는 은대만 많이 있다. 이는 말을 몰면서 고삐를 버리고, 말의 재갈이 벗겨짐으로 인해 네 마리 말이 제멋대로 내달리는 것과 같다. 황로(국운)가 위험하고 기울어진 상황이니 바야흐로 고삐를 잡아 수레를 멈추어 구해야만 한다 (…)”
- 신 사마광은 평한다. ”(…) 대개 쇠퇴한 세상의 군주는 대부분 나약하고, 무릇 어리석게 보좌하는 신하들은 오직 구차하고 고식적인 것만 안다. 권력을 지닌 총신은 죄를 지어도 연루되지 않고, 세력 있고 교활한 백성은 범범을 해도 주벌을 당하지 않는다. 인은을 베풀어도 눈앞에서 그치고, 간귀(간사한 도적)가 뜻을 얻고, 나라의 기강이 서지 않는 이유이다. (…)”
권 54, 46 환관이 권력을 쥐다
한환제 연희 2년 (159)
6
- 최기는 문장 덕분에 양기로부터 우대를 받았다. 그가 <외척잠>과 <백혹부>를 지어 양씨 일가를 풍자하자 양기가 화를 냈다. 최기가 말했다. “옛날 춘추시대 중엽 관중은 제나라의 재상으로 있을 때 자신을 나무라며 간하는 말을 즐겨 들었습니다. 한나라 건국 공신인 소하는 한나라를 보필하면서 서과지리(허물을 기록하는 관원)를 두었습니다. 지금 장군은 여러 세대에 걸쳐 태보(재상)를 지낸 까닭에 그 책임이 이윤 • 주공과 나란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덕정을 펼쳤다는 말은 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반 백성이 도탄에 빠졌는데도 곧고 어진 인사를 받아들여 화를 당하고 실패하기는커녕, 선비의 입을 틀어막으며 군주의 귀를 막고, 장차 흑색과 황색을 뒤바꾸고, 말과 사슴의 모습을 바꾸려는 것입니까?” 양기가 대답할 길이 없어 최기를 돌아가게 했다. 최기는 두려운 나머지 도망가 숨었으나 양기가 곧 잡아다가 죽였다.
- 양기가 병정을 한 지 거의 20년이 다 되자 안팎으로 위세를 크게 떨치게 됐다. 천자는 팔짱을 끼는 모습만 보인 채 정사에 직접 참여할 수가 없었다. 황제가 내심 이를 불평했다.
- 당형을 비롯해 선초, 좌관, 서황, 구원 등 다섯 명의 중상시를 불러 함께 양기 제거에 관한 대책을 논의한 뒤 황제가 선초의 팔을 깨물어 피를 내고 맹서했다.
- 8월 10일, (…) 병사 총 1000여 명을 이끌고 가 사례교위 장표와 함께 양기의 집을 에워싸게 했다. (…) 양기와 그의 처 손수는 바로 그날 모두 자살했다. (양씨와 손씨 일가 수십 명이 죽었고, 옛 관원과 빈객 가운데 면직돼 쫓겨난 자가 300여 명에 달해 조정이 텅 비게 됐다.
한환제 연희 6년 (163)
10
- 조서를 내려 황보규를 도료장군으로 삼았다. (장환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당초 양기의 고리로 있던 까닭에 면관되어 금고에 처해졌는데 그의 옛 친구들은 아무도 말을 못하고 오직 황보규만이 그를 일곱 번 천거해서 무위 태수에 제수됐다.) 황보규가 도료장군이 되어 군영에 온 지 몇 달이 지나 서신을 올려 장환을 천거했다. “장환은 재략이 모두 우수한 까닭에 마땅히 도료장군인 원수의 자리를 맡겨 중망에 부응해야 합니다. 만일 여전히 우신이 군사의 직책을 맡는게 타당하다고 여긴다면 바라건대 저를 용관(쓸모없는 관직)으로 만들어 장환의 부관으로 일하게 해 주십시오.” 조정이 이를 좇았다.
권 55, 47 당고의 화를 조성하다
한환제 연희 7년 (164)
1
- (역자 주) 공자는 위나라 대부 영무자의 치세와 난세를 구분해 현명하게 대처한 행보를 두고 “영무자는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지혜롭게 처신했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마치 어리석은 듯이 처신했다. 나는 그의 지혜로운 처신에는 가히 미칠 수 있으나, 어리석은 듯이 행동하는 처신에는 미칠 수 없다”라고 칭송한 바 있다.
- “곽종림(태)은 어떤 사람이오?” 범방이 대답했다. “은거하면서 부모님 말씀을 어기지 않았고, 정직하면서도 세상과 절연하지 않았소, 천자는 신하로 삼고자 했으나 그리하지 못했고, 제후는 친구로 삼고자 했으나 그리하지 못했소. 나는 그 밖의 것은 알지 못하오.”
- (출사의 권에 대해 곽태가) “나는 밤에 천문 현상을 관찰하고, 낮에는 인사를 살피오. 하늘이 폐기하려고 하면 지탱시킬 수 없소. 나는 장차 천하를 여유있게 유람을 하다가 숨을 거두려 할 뿐이오.”
한환제 연희 8년 (165)
4
- 중상시 후람의 동생 후삼은 잔학하고 탐도해 쌓아 둔 재산이 1억 전을 헤아렸다. 태위 양벙이 주청해 함거로 후삼을 불러들이도록 했는데 후삼이 도중에 자살했다. 그의 수레는 무게가 300여 량에 달했고 모두 금은과 금백으로 꾸며져 있었다. 양병이 상주했다. ”(…) 환관은 본래 궁궐인 성달의 급사로 있으면서 날이 어두워지면 야간 경비를 담당했습니다. 지금은 외람되게도 과분한 은총을 받아 정권을 잡고 권력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 사는 곳은 왕공을 본받고, 부유함은 나라를 본뜨고, 음식은 효선(진수성찬)을 다하고, 복첩까지 비단을 몸에 휘두르고 있습니다. (…)“
12
- 5월 22일, 태위 양병이 훙거했다. 양병은 위인이 청백하고 과욕했다. 그는 일찍이 이같이 말했다. “나에게는 세 가지 미혹되지 않는 이른바 ‘삼불혹’이 있다. 주와 색과 재가 그것이다.”
한환제 연희 9년 (166)
1
- (역자주) «서경»<무일>에 “은나라 고종의 둘째 아들 조갑은 형인 조경을 제치고 왕이 되는 것이 의롭지 않다고 여겨 오랫동안 아래 백성으로 있었다. 조경 사후 즉위해서는 서민을 보호하며 은혜를 베풀었고, 홀아비나 과부를 감히 업힌여기지 않았다. 그의 재위 기간은 33년이었다. 이후에 즉위한 군주는태어날 때부터 편안했다. 태어나면 곧 편안했기에 농사의 어려움을 전혀 알지 못했다. 백성의 수고로움을 듣지 못한 채 오직 마음껏 즐기는 일만 추구했다. 이후 아무도 오랫동안 나라를 다스리지 못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8
- 한명제의 영평 연간 이래 신민 가운데 비록 부처의 술법을 믿는 자가 있기는 했으나 천자는 아직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환제의 시기에 이르러 마침내 독실한 자세로 호불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늘 직접 사당으로 가서 기도했다.
권 56, 48 붕당이 척결 대상이 되다
한환제 영강 원년 (167)
8
- (장환이 사마윤단과 동탁을 파견해 강족을 대파했으나 환관을 섬기지 않은 까닭에 열후에 봉해지지는 않고 돈만 하사 받았다.)
- 동탁에게도 벼슬을 내려 낭중으로 삼았다. 동탁은 농서 출신으로 조맹한 성품에 모략을 지고 있었다. 강족과 호족이 그를 두려워했다.
10
- 12월 23일, 황제가 덕양전전에서 붕어했다.
- (후사가 없어) 해독정후 유굉을 봉영하게 했다. 당시 유굉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한영제 건녕 2년 (169)
5
- (…) 이 싸움에서 단경은 모두 180차례의 전투를 벌여 모두 3만 8000명을 죽였고 각족 가축 42만 7000여 두를 포획했다. (…) 신 사마광은 평한다. ”(…) 만이 융적이 비록 이민족이기는 하나 이익을 좇고 해를 피하고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우리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치도로써 그들을 통치하면 그들도 곧 복종할 것이고 치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그들은 곧 반란을 일으키니 이는 본래 당연한 것이다. (…) 단경이 비록 뛰어난 장군으로 적을 이긴 공로가 있다 하더라도 군자로서는 그의 행동을 찬동할 수 없는 것이다.”
8
- 신 사마광은 평한다. “천하에 도가 있어야만 군자는 조정에서 정의를 펼칠 수 있고 소인을 치죄하더라도 감히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게 된다. 천하에 도가 없으면 군자는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소인의 무함으로 인한 화를 피해야 하는데 사실 그렇게 하더라도 화를 피하기가 어렵다. (…) 혹형을 당하고 화가 친구에게 미쳐 선비들이 없어지게 되면 왕조 또한 멸망하게 되니 이 어찌 비통한 일이 아니겠는가? (…)”
한영제 건녕 3년 (170)
2
- 단경을 경성으로 불러 시중에 임명했다. 단경은 변경에서 십수년을 보내면서 풀로 만든 잠자리에서 잠을 자며 기꺼이 장병들과 고락을 같이 했다. 장병들이 모두 그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고자 해 가는 곳마다 공훈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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