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통감 9
사마광 저, 신동준 역, 올재
권 65, 한기 57 중장통이 《창언》을 쓰다
한헌제 건안 11년 (206)
3
-
중장통은 <<창언>> 한 권을 저술했다. 내용은 주로 치란을 논한 것으로 그 대강은 다음과 같다.
-
“천명을 받은 호걸은 처음부터 천하의 명분을 갖고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천하의 명분이 없으니 자연 천하를 찾으려는 인물이 분분히 일어나게 된다. 지혜를 다투는 자가 지혜를 다해 궁해지고 힘을 다투는 자가 힘을 다해 실패하게 되면 그 형세가 더 이상 대적할 수 없고 그 역량이 더 이상 비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천명을 받은 호걸은 이때 비로소 자신의 약속을 개시할 수 있게 돼 머리 숙여 천명을 받게 된다. 제왕의 후사가 뒤를 잇는 때에 이르게 되면 호걸들의 웅지는 이매 재가 돼 연기처럼 사라지고 민심은 이미 안정돼 현귀한 가문도 이미 확립되니 지존은 오직 한 사람에게만 있게 된다. 이 때에는 설령 하우의 인물일지라도 지존의 자리에 있게 되면 능히 은덕을 베풀어 천지와 같게 되고 위신 또한 귀신과 닮게 된다. (…) 보위를 이은 어리석은 군주들은 천하에 감히 자신과 대항할 것이 없는 것으로 보게 되고 스스로 자신의 보위와 천지는 영원히 망하지 않는 것으로 보게 된다. 멋대로 방종하게 되고 자신의 욕심을 끝없이 키우게 된다. 군신이 공개적으로 음략을 즐기고 위아래 사람들이 똑같이 악하며 조정을 황폐하게 하니 인재를 잃거나 잊게 된다. 신임을 받은 측근은 모두 간영한 아첨꾼이니 총애해 귀하게 중용되는 자는 모두 비빈들의 가족이다. 마침내 천하의 고혈을 모두 태워버리고 만민의 골수까지 빼내게 되니 원성이 길에 들끓고 백성이 편히 살 수 없게 된다. 재난과 전란이 어지러이 동시에 일어나 중국이 시끄러워지니 사방의 오랑캐가 배반하고 분분히 침략해 조정이 붕괴되고 대세가 순식간에 기울어져 전에 내가 먹여 기른 자손들이 지금은 모두 나의 피를 빨아먹는 원수가 된다. 이때가 되면 이미 시운이 바뀌고 대세가 이미 무너진 것이다.(…) 누대의 존망이 부단히 다시 바뀌게 되고 천하의 치란은 다시 돌기 시작한다. 이는 천지운행의 규율인 천도가 늘 그러한 이치이기도 하다.”
한헌제 건안 12년 (207)
05
- 조조가 오환을 북벌할 때 유비는 유표에게 허현을 습격할 것을 권했으나 유표가 듣지 않았다. 유표는 조조가 돌아왔다는 소리를 듣고 유비에게 미안해했다. “군의 얘기를 듣지 않아 절호의 기회를 놓쳤소.” 유비가 위로했다. “지금 천하가 분열되어 날마다 전쟁이 그치지 않고 있으니 기회가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만일 다음번 기회에 곧바로 움직이게 되면 이번의 실기는 그다지 애석해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7
-
당초 낭야 출신 제갈량은 양양의 융중(호북성 양양 서쪽)에 살았다. 그는 늘 자신을 관중•악의에 비유하곤 했다. 당시의 사람들 대부분이 그의 존재를 몰랐다. 단지 영천 출싱 서서와 최주평만이 그가 인물임을 알았다.
-
유비가 형주에 있을 때 양양 출신 사마휘를 방문해 현사의 추천을 청하자 사마휘가 말했다. ”(…) 복룡과 봉추가 있습니다. (…) 그들은 바로 제갈공명과 방사원입니다.”
-
서서가 신야에서 유비를 배견하자 유비가 그를 매우 중히 여겼다. 유비가 서서에게 제갈공명에 대해 묻자 서서가 유비에게 반문했다. “제갈공명은 와룡입니다. 장군은 어찌해 그를 보려고 하는 것입니까? (…) 저는 가서 그를 만날 수는 있어도 부를 수는 없습니다. 장군이 의당 친히 왕림해야 만날 수 있습니다.” (…) 유비가 제갈량을 찾아갔으나 모두 세 번을 찾아가서야 그를 만나볼 수 있었다.
-
유비가 곧 좌우사람을 물리고 물었다. “한실이 무너져 간신이 조정을 잡고 있기에 고는 자신의 덕성과 역량은 생각지도 않고 천하에 대의를 펴려고 했소. 그러나 지모가 천단해 좌절한 후 현재에 이르게 됐소. 뜻만큼은 아직 버리지 않고 있으니 장차 어찌해야 좋을 지 일러 주시오.”
-
제갈량이 대답했다. “지금 조조가 이미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협천자로 제후를 호령하고 있으니 확실히 그와 쟁봉 교전할 수는 없습니다. 손권은 강동에 웅거한 지 이미 3대가 지났고 지세 또한 험한 데다 백성이 믿고 따르며 현능한 인재가 등용되고 있으니 그와 동맹을 맺을 수는 있어도 도모할 수는 없습니다. 형주는 북쪽으로 한수•면수에 걸쳐 있어 남해로 통할 수 있고 동쪽으로 오군•회계군, 서쪽으로 파군•촉군으로 통하니 이는 사방이 터져 있는 요충지입니다. 그 주인은 이를 지킬 수 없으니 이는 거의 하늘이 장군에게 주려는 것이라고 할 만합니다. 익주는 지세가 험조하고 옥야가 1000리에 걸쳐 자원이 풍부한 땅이나 유장이 암약해 장로가 북쪽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백성이 은실하고 나라가 부유한 모습이나 유장이 이를 지키고 다독일 줄 몰라 지혜 있고 재능 있는 자들이 명군 얻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장군은 이미 황실의 후예로 신의가 사해에 떨치고 있습니다. 만일 형주와 익주를 얻어 그 험조함을 지켜 백성을 안무하고, 융족•월족을 감싸 안고 손권과 결맹한 뒤 안으로 정치를 밝게 하고 밖으로 시변을 관찰하면 가히 패왕의 업을 이루어 한실을 흥기시킬 수 있습니다.” 유비가 기뻐했다. “훌륭합니다.”
-
유비의 제갈량에 대한 총애와 정이 날이 갈수록 더욱 깊어졌다. 관우와 장비가 불평하는 기색을 보이자 유비가 그들을 다독이며 말했다. “내가 공명을 얻은 것은 물고기가 물을 만나는 것과 같다. 원컨대 제군들은 다시 말하지 마라!” 관우와 장비가 불평을 멈췄다.
한헌제 건안 13년 (208)
9
- 태사대부 공융을 공개 처형해 시체를 거리에 방치했다. 공융은 그의 재주와 명망을 믿고 누차 조조를 희롱하고 모욕했다. 언사가 매우 편협하고 방자한 모습을 보여 이치에서 벗어난 적이 많았다. (…) 당초 경조인 지습은 공융과 매우 친했다. 그는 늘 공융에게 성정이 너무 강직해 반드시 재난을 만날 것이라고 충고했다.
10
- 어떤 이가 유비에게 유종을 쳐 형주를 취하라고 권하자 유비가 이를 거절했다. “유 형주가 죽으면서 어린 아들을 나에게 부탁했다. 자신이 살기 위해 신의를 배신하는 것을 나는 할 수 없다. 내가 죽어서 무슨 면목으로 유 형주를 볼 것인가?” 결국 유비는 자신의 군사를 이끌고 번성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 유종의 좌우 측근과 형주의 사람들은 대다수가 유비에게 귀부했었다. (…) 당양에 도착했을 때 부중의 수가 10여만 명에 이르렀고 치중 또한 수천 대에 달했다. 하루에 10여 리를 가게 되자 (… 사람들이 부중을 버리고 빨리 가서 조조의 추격을 피해야 한다고 권하자…) 유비가 거절했다. “무릇 대업을 완성하려면 반드시 사람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오. 지금 사람들이 나에게 귀부했는데 내가 어떻게 그들을 버리고 떠날 수 있겠소?“
13
- 당시 조조 군 내에는 이미 역질이 돌고 있었다. (…) 주유의 부장 황개가 건의했다. “지금 적의 수는 많고 우리는 적어 지구전이 어렵습니다. 조조 군이 바야흐로 함선들을 모두 일렬로 늘여 세워 앞뒤를 붙여 놓았으니 가히 불을 지를 뒤 도망할 수 있습니다.” (…) 황개가 우선 조조에게 서신을 보내 거짓으로 투항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때는 마침 동남풍이 맹렬히 불고 있었다. (…) 강북의 조조 군으로부터 2리가량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 몽충 배에 동시에 불을 붙이니 화광이 충천했다. 이때 미친 듯이 부는 바람으로 인해 쏜살같이 나아간 몽충 배의 불길이 조조 군의 배에 옮겨붙어 조조 군의 배를 모두 태워 버린 뒤 군영까지 동시에 태워 버렸다.
권 66, 한기 58 유비가 익주로 진출하다
한헌제 건안 14년 (209)
7
- 손권이 여동생을 유비에게 주었다. 손권의 여동생은 재주가 민첩한 데다 강맹해 우두머리의 풍모를 지녔다. 시비가 100여 명에 달했고 이들 모두 칼을 들고 시립했다. 유비가 매번 집안에 들 때마다 마음이 늘 두려워 불안해 하는 모습을 보였다.
8
- 승상연 화흡이 조조에게 진언했다. “천하의 사람은 각기 재능과 품성이 달라 하나의 표준으로는 취사선택할 수 없습니다. 검소함이 지나칠 경우 스스로 그렇게 처신하는 것으로 족합니다. 이 기준을 일체의 사물에 적용할 경우 잃는 것이 많게 됩니다. 지금 조정의 여론은 관리 중에 새로운 옷을 입고 좋은 말을 타는 자가 있으면 청렴치 못하다고 말하고 반대로 겉을 꾸미지 않고 낡은 옷을 입고 다니면 염결하다고 말합니다. 사대부로 하여금 고의로 자신의 옷을 더럽고 헤진 것으로 만들고 수레와 옷을 감추도록 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조정의 어떤 고관은 스스로 음식을 싸들고 와 관공서에서 먹기도 합니다. 무릇 민속을 교화할 때는 중용지도를 귀하게 여기니 이것만이 가히 전승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획일적으로 지키기 어려운 행위를 숭상해 그것을 표준으로 서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이를 강력히 권하는 것은 결국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고야 말 것입니다. (…)” 조조가 화흡의 견해가 매우 좋다고 생각했다.
한헌제 건안 15년 (210)
5
-
주유가 강릉에 돌아와 행장을 준비하다 노상에서 중병에 걸리게 되자 손권에게 전을 올려 간했다. “수명의 장단은 천명이니 실로 애석해할 일이 아닙니다. 다만 저의 작은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다시는 명을 받들 수 없게 된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지금 조조는 북방을 점거하고 있으나 강역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고 유비는 나라 안에 기거하고 있어 마치 호랑이를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천하대사가 과연 어찌 될지 알 수 없으니 지금은 바로 조정 백관이 간식해야 하는 가을이고 지존이 마음을 다해 계책을 마련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노숙은 충렬한 데다 일을 처리하면서 조금도 구차하지 않으니 가히 저를 대신할 만합니다. 제 건의가 채용되기만 한다면 저는 비록 죽더라도 몸은 조금도 썩지 않을 것입니다.” 주유가 파구(호남성 악양시)에서 죽었다.
-
주유는 2남 1녀를 두었다. 손권이 장자 손등을 위해 그의 딸을 며느리로 삼았다. 그의 아들 주순을 기도위에 임명해 자신의 딸을 처로 맞아들이게 했고 주윤도 흥업도위에 임명해 일족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
당초 주유는 손권과 붕우지교를 맺었기 때문에 태부인 또한 손권에게 주유를 형으로 대우하게 했다. 그 때 손권의 직위는 장군으로 제장과 빈객들이 그를 대하는 예절은 매우 간략했다. 오직 주유만큼은 손권에 대해 모든 정성을 다해 신하의 예로 성실하게 받들었다.
-
정보가 자신이 연장자라고 생각해 여러 번 주유를 모욕했으나 주유는 그에 대해 몸을 낮춰 겸하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시종 그와는 스스로를 비교하지 않았다. 정보가 후에 마음으로부터 경복해 주유를 매우 친중하게 여기게 됐다. 그는 늘 주변 사람엑게 주유를 칭찬했다. “주 공근과 사귀게 되면 마치 맛있는 술을 마시는 것과 같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취하게 된다.”
-
당초 손권이 여몽에게 권해 말한 적이 있었다. “경은 지금 일을 처리하는 자리에 앉게 됐으니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여몽이 군중이 일이 많은 것을 핑계로 사양하자 손권이 말했다. “고가 어찌 경보에게 경전을 공부해 박사가 되라고 하는 것인가? 단지 두루 섭렵해 옛일을 알 수 있는 정도면 되오. 경은 일이 많다고 하나 고보다 더 많은가? 고는 늘 독서를 하는데 유익한 점이 매우 많소.” 여몽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한헌제 건안 18년 (213)
1
-
(조조가 40만 명으로 유수의 수구로 진군했을 때) 손권이 군사 7만 명을 거느리고 조조의 남진을 막았다. 한 달여를 대치하다가 조조가 손권 군사의 전함과 군진 등이 정숙하게 정비돼 있는 것을 보고 탄식했다. “아들을 낳으려면 의당 손중모와 같은 아들을 낳아야 한다. 유 경승의 아들은 개와 돼지에 불과할 뿐이다!”
-
손권이 전(쪽지 서신)을 조조에게 보내어 말했다. “춘수가 바야흐로 넘치려 하니 공은 의당 속히 돌아가시오.” 별지에는 다음과 같은 제안이 덧붙여져 있었다. “족하가 죽지 않으면 고가 안녕할 수 없소.” 조조가 제장들에게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손권은 고를 속이지 않는다.” 이내 철군해 돌아왔다.
8
- 가을 7월, 위나라가 사직과 종묘를 건립하기 시작했다.
9
- (역자주: 이 부분부터 《자치통감》은 조조의 성을 쓰지 않고 ‘위공’으로 칭하고 있다.)
권 67, 한기 59 형주를 반씩 나누다
한헌제 건안 19년 (214)
2
- 3월, 조령으로 위공의 지위를 제후왕의 위에 두게 해 금새와 홍색의 인끈인 적불, 원유관을 주었다.
7
- 위나라의 상서령 순유가 죽었다. 순유는 생각이 매우 깊고 주밀해 자신을 지키는 지혜가 있었다. 위공을 따라 전장에 나가 늘 장막 안에서 전략을 짜는 것에 능해 당시 사람들과 그 자식들은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아는 자가 없었다. 위공이 일찍이 그를 칭찬해 이같이 말한 바 있다. “순문약(순욱)은 선을 권하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치지 않고 순공달(순유)은 잘못을 간하는 것이 실행되지 않으면 그치지 않는다.” 또 칭찬해 이같이 말한 적이 있따. “2순령(순욱과 순유)의 인물평은 시간이 지날 수록 사람을 더욱 신복하게 하니 나는 종신토록 잊을 수 없다.”
9
-
황제가 허현으로 도읍지를 옮긴 이후 근근이 명목만 유지할 뿐이었다. 좌우의 시종 가운데 위공의 사람이 아닌 자가 없었다. (…) 위공이 후에 다른 일로 황제를 만나게 되지 황제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말했다. “군이 만일 나를 보좌하려 하면 관대히 하고 그렇지 않으면 은혜를 베풀어 나를 버리도록 하시오.” 조조가 대경실색해 여러 번 머리를 조아리면 퇴청하길 청했다. 옛날의 의례에 따르면 삼공이 군사를 통솔하게 되면 조회할 때 황제를 모시는 호본이 칼을 빼어들고 좌우에 시립하게 돼 있었다. 위공이 궁을 나오면서 좌우를 둘러 보고 식은땀을 흘린 후 다시는 조견하지 않았다.
-
동승의 딸은 귀인이다. 조조가 동승을 죽이고 귀인도 죽이려고 하자 황제가 귀인이 임신한 것을 이유로 여러 번 조조에게 사정했으나 동의를 얻지 못했다. 복황후가 두려워한 나머지 서신을 부친인 복완에게 보내 조조가 황제를 핍박한 상황을 알리고 조조를 은밀히 도모할 것을 명했으나 복완이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얼마 후 이 일이 누설되자 조조가 대로했다. 11월, 조조가 어사대부 치려에게 부절·서책을 가지고 가 황후의 새수를 거두게 했다. 이어 상서령 화흠을 치려의 부관으로 삼아 그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입궁해 황후를 끌어내게 했다. 황후가 문을 닫고 벽 사이에 숨자 화흠이 문을 부수고 벽장을 뜯어낸 후 황후를 끌어내게 했다. 이때 황제가 외전에 있다가 치려에게 다가와 앉게 했다. 황후가 산발에 맨발인 채로 병사들에게 이끌려 울면서 황제 앞을 지나가다가 결별인사를 하며 물었다. “다시 나를 구할 수 없습니까?” 황제가 처연히 말했다. “나 또한 내가 언제까지 살지 모르오.” 고개를 돌려 치려에게 한탄했다. “치 공,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소!” 황후를 폭실에 유폐해 죽게 했다. 황후 소생의 두 황자는 모두 짐살됐고 그녀의 형제와 종족으로 피살된 자만 100여 명에 가까웠다.
권 68, 한기 60 한중을 두고 대치하다
한헌제 건안 22년 (217)
6
- 결국 위왕이 조비를 태자로 확정지었다. 황후궁의 측근 관원인 장어가 변부인(조비의 모)에게 축하했다. “장군이 태자가 됐으니 천하에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부인은 의당 창고에 있는 재물을 가져다가 상으로 나눠 주어야 합니다.” 변부인이 말했다. “위왕은 조비가 연장자라고 생각해 그를 후계자로 삼은 것이오. 나는 단지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책임을 면하게 된 것만이 다행이라고 생각할 뿐이오. 다른 사람들에게 후히 상을 내릴 이유가 무엇이 있겠소?” 장어가 돌아와 이를 위황에게 말하자 위황이 크게 기뻐했다. “사람이 화가 나도 안색이 변치 않고, 기뻐도 절제를 잃지 않기가 사실 가장 어려운 일이다!”
한헌제 건안 24년 (219)
7
- 가을 7월, 유비가 한중왕을 자칭했다. 면양(섬서성 면현 서남쪽)에 광장의 높은 연단인 단장을 세우고 군진을 펼쳤다. 신료들이 전후에 배종한 가운데 주장을 읽는 일이 모두 끝난 뒤 새수를 경건히 받고 왕관을 썼다. 유비가 사자를 통해 주장을 올리면서 전에 받았단 좌장군·의성정후의 인수를 반환하고 아들 유선을 왕태자로 삼았다.
14
- 12월, 반장의 사마 마충이 장향(호북성 당양 동북쪽)에서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을 잡아 목을 베자 형주가 완전히 평정됐다.
16
-
위왕이 손권을 표기장군으로 삼고, 형주목으로 추천하고 남창후(강서성 남창 남쪽)에 봉했다. 손권이 교위 양우를 보내 공물을 바치게 하고 주광 등을 통해 위왕에게 상주문을 바치면서 스스로 칭신한 뒤 위왕이 천명을 받들어 칭제할 것을 권했다. 위왕이 손권의 상주문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말했다. “이 어린애가 나를 화로 옆에 앉혀 태우려 한다!” (신하들이 그렇게 할 것을 조언하자) 조조가 거부했다. “혹여 천명이 나에게 있다면 나는 주문왕과 같이 되리라.”
-
(역자주) 주문왕은 천하의 3분의 2를 차지하고도 은나라에 계속 신복했다. 그는 그의 아들 주무왕에 의해 훗날 문왕으로 추승된 것이다. 조조는 바로 자신이 처한 상황이 주문왕 당시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본 것이다. 이는 자싱의 대에서는 결코 칭제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권 69, 위기 1 조비가 황제로 즉위하다
위문제 황초 원년 (220)
1
- 봄 정월, 위왕 조조가 낙양에 이르렀다. 1월 23일, 위왕이 훙거했다. 위왕은 사람을 잘 파악해 거짓으로 미혹하기가 어려웠다. 특별히 재능 있는 자를 능히 식별해 발탁할 줄 알았고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재능에 따라 임용하니 그들 모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적과 대진해 싸울 때 태연자약해 마치 싸우지 않는 듯했으나 결정적인 기회에 결단해 승세를 탈 때는 기세가 용솟음쳐 마치 돌을 뚫는 듯했다. 공이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었고 천금을 아끼지 않았다. 법을 집행하는 게 엄려하고 긴박해 범법자는 반드시 주살됐으니 비록 범법자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애석해할지라도 끝내 사면치 않았다. 평소 검박하게 살면서 화려한 것을 싫어했다. 군웅을 제거하고 해내를 거의 평정하게 된 것이다.
17
-
겨울 10월 13일, 한나라 황제가 한고제의 묘에 나아가 제사를 올린 후 행 어사대부 장음에게 부절을 든 채 새수와 조서를 기록한 책을 받들어 위왕 앞으로 나아가게 해 선양의 뜻을 전하게 했다. 위왕이 세 번 글을 올려 사양한 후 비로소 번양(하남성 허창)에 단을 쌓게 했다.
-
10월 29일, 위왕이 단에 올라 새수를 받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불을 피워 천지를 비롯해 산과 강하에 제를 올렸다. 이어 연호를 바꾸고 천하에 대사령을 포고했다.
위문제 황초 2년 (221)
4
-
여름 4월 6일, 한중왕 유비가 무담(사천성 성도 서북쪽의 남쪽)에 단을 세우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천하에 대사령을 내리고 연호를 장무로 고쳤다. 제갈량을 승상으로 삼고 허정을 사도에 임명했다.
-
신 사마광은 평한다. ”(…) 삼국시대 당시 촉나라의 소열(유비)을 한나라와의 관계에서 보면 그는 비록 중산정왕의 후예임을 자처했으나 족친 관계가 너무 소원해 몇 대 후손인지와 신분이 어떠했는지 등에 관해 전혀 알 길이 없다. 이는 마치 남조의 송고조 유유가 한나라 때의 초원왕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남당의 열조 이승이 당나라 때의 오왕 이각의 후예임을 자처한 것과 같아 그 시비를 가리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그를 두고 감히 전한을 이은 후한의 광무제와 서진을 이은 동진의 원제 등에 비유해 한나라의 정통을 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12
-
당초 거기장군 장비는 웅장용맹한 면에서 관우에 버금갔다. 관우가 병사들에게는 잘 대해 주면서 사대부에게는 오만했던 데 반해 장비는 사대부에게는 예로써 대우하면서도 병사들에게는 가차가 없었다. 한주 유비가 장비에게 경계해 이같이 말하곤 했다. “경의 형살이 이미 도가 지나치고 또 날마다 건장한 병사들을 채찍질하고도 그들을 신변에 두니 이는 스스로 화를 부르는 길이다.” 그러나 장비는 이런 버릇을 여전히 고치지 않았다.
-
한주가 손권을 치려고 할 때 장비는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낭중에서 강주로 와 대군과 회합하기로 돼 있었다. 출발에 임박해 장비의 휘하 장군 장달 · 범강이 장비를 죽인 뒤 그 수급을 가지고 물을 따라 내려가 손권에게 달아났다. 한주가 장비의 영도독이 올린 표문을 읽고 탄식했다. “아, 장비가 죽었다!”
-
서진 때의 사가 진수는 《삼국지》에서 이같이 평했다. “관우와 장비는 모두 만인의 적을 당할 수 있다고 칭해진 일대의 호신(무신)이다. 관우는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조조에게 충성을 바쳤고 장비는 대의에 입각해 엄안을 석방했으니 두 사람 모두 군자의 풍모가 있었다. 관우는 각박하며 자긍심이 강했고 장비는 폭압을 휘둘러 은혜를 몰랐으니 두 사람 모두 이런 단점 때문에 실패하게 된 것이다. 이는 천지의 이치에 따른 것이다.”
21
- 황제가 또 물었다. “오왕은 학문이 깊소?” 조자가 대답했다. “오왕은 전선 1만 척을 강에 띄워 놓고 100만의 군사를 이끌고 있습니다. 현능한 자를 임용해 그 능력을 펴게 하고 오직 뜻을 천하 사방을 다스리는 경략에 두고 있으니 비록 짧은 여가일지라도 시간만 나면 여러 책과 사서를 두루 섭렵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기묘한 요점만을 취하니 유생들이 글의 대강도 모른 채 일부 글귀만 취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24
- 오왕이 무창의 조대에서 연회를 베풀고 크게 취해 시종에게 물을 떠 가지고 와 신료들을 씻어 주라고 명한 후 술을 권했다. “오늘 통쾌히 마시고자 하니 대취해 조대 위에서 쓰러져 넘어질지라도 멈추지 마시오.” 장소가 정색을 해 말을 하지 않은 채 밖으로 나가 수레 안에 앉아 있었다. 오왕이 사람을 보내 장소를 불러 조대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물었다. “단지 함께 즐기고자 한는 것 뿐인데 공은 무엇 때문에 그리 화가 난 것이오?” 장소가 대답했다. “예전에 은나라의 주왕은 조구와 주지를 만들어 밤을 새워 술을 마셨습니다. 당시에도 같이 즐긴다고 생각했지 일을 망친다고 생각지는 않았습니다.” 오왕이 한마디도 못하고 부끄러운 생각에 이내 연회를 파했다.
위문제 황초 3년 (222)
11
- 당초 육손이 대도독을 맡았을 때 제장들 가운데 일부는 토역장군 손책의 옛 장수들이었고 일부는 손씨의 일가친척이어서 자긍심이 강한 나머지 육손의 지휘를 듣지 않았다. 육손이 한 손으로 칼자루를 거머쥔 채 단호한 어조로 주의를 주었다. ”(…) 나는 비록 서생이기는 하지만 주상의 명을 받았고 주상이 제군들을 임명한 것은 나의 지휘를 받도록 하려는 것이었소. (…) 군령은 추호의 가차가 없으니 모두 조금이라도 위배되어서는 안 될 것이오.” 마침내 유비를 깨뜨리는 계책이 대부분 육손에게서 나오자 제장들이 이내 심복했다. 오왕이 이 얘기를 듣고 육손에게 물었다. “공은 어찌해서 당초에 나에게 지휘를 따르지 않는 제장들의 얘기를 보고하지 않았소?” 육손이 대답했다. “그들 모두 깊고 큰 은혜를 입은 자들로 그 중에는 지존의 복심과 조아, 혹은 공신도 있었습니다. 모두 의당 국가 대업을 이루기 위해 지존과 함께 일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신은 전국시대 조나라의 재상인 인상여오 후한의 개국 공신인 구순이 나라를 제대로 만들기 위해 스스로 몸을 굽힌 행동을 늘 앙모해 왔습니다.” 오왕 손권이 크게 웃으며 그를 칭송했다.
권 70, 위기 2 제갈량이 남만을 정벌하다
위문제 황초 4년 (223)
5
-
한주 유비가 병이 깊어지자 승상 제갈량에게 태자를 보좌하도록 명하고 (…) 유언했다. “군의 재능은 조비의 열 배 되니 반드시 국가를 안정시키고 끝내 대사를 완성시킬 수 있을 것이오. 만일 태자가 가히 보좌할 만하면 그를 보좌하고 만일 그가 무능하면 그를 대신해도 좋소.”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신이 감히 신하로서의 헌신과 충정의 절개를 다하지 않겠습니까? 죽을 때까지 이를 계속할 것입니다!”
-
한주 유비가 또 태자에게 조칙을 내려 명했다. “사람이 50세에 죽으면 요절이라 하지 않는데 나는 이미 60여 세니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단지 너의 형제가 마음에 걸릴 뿐이다. 노력하고 또 노력하라. 악이 작다고 행하지 말고 선이 작다고 안 하지 마라. 현덕만이 비로소 사람을 신복시킬 수 있다. 네 아비는 덕이 박해 네가 배울 만한 것이 없다. 너는 승상과 같이 일을 하면서 부모를 모시듯이 섬기도록 하라.”
-
여름 4월 계사, 한주가 영안에서 붕조했다. 시호는 소열이다.
-
제갈량이 일찍이 직접 부서를 검교하자 주부 양옹이 이를 보고 곧바로 간했다. “국가를 다스리는 데에는 체계가 있으니 상하의 직권이 상호 침범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명공을 위해 비유를 들 터이니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한 주인이 있는데 노복에게는 밭을 갈도록 하고, 시비에게는 밥을 짓게 하고, 수탉에게는 아침을 알리게 하고, 수캐에게는 도둑을 막게 하고, 소에게는 수레를 끌게 하고, 말에게는 먼 길을 가게 하자 집안일에 전혀 빈틈이 없게 됐고 얻고자 한 것을 모두 얻을 수 있게 됐습니다. 주인은 늘 부드러운 얼굴로 고침하게 되니 하는 일이라고는 오직 밥 먹고 술 마시는 것뿐이었습니다. 갑자기 어느 날 자신이 직접 모든 일을 처리하는게 낫다고 생각해 다시는 노복들에게 이를 맡기지 않은 채 자신이 몸소 나서 일일이 챙기게 됐습니다. 노복들이 하는 소소한 일까지 직접 챙기다 보니 결국 몸과 마음이 모두 소진돼 하나도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어찌 이를 두고 그의 지혜만큼은 노비나 짐승들과는 다르다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가장으로서의 직무를 버린 까닭에 그같이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고인들은 말하기를, ‘앉아서 도를 논하는 것은 왕공의 일이고 일을 계획하고 집행하는 것은 사대부의 일이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 지금 명공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오히려 몸소 부서를 검교하면서 종일 땀을 흘리니 이는 고생을 사서 하는 게 아겠습니까?” 제갈량이 그에게 깊은 사의를 표했다. 양옹이 죽자 제갈량이 3일 동안이나 울었다.
위문제 황초 6년 (225)
8
- 맹획이 옹개의 잔병을 모아 제갈량에게 저항했다. 맹획은 평소 종래 현지에 사는 이인들과 한인들의 신뢰를 받고 있었다. 제갈량이 그를 생포한 뒤 그에게 군영 곳곳을 둘러보게 한 뒤 물었다. “우리 군세가 어떠하오?” 맹획이 대답했다. “내가 향자에는 허실을 몰라 실패했소. 지금 허락을 받아 군영과 병진을 모두 둘러보니 만일 이 정도라면 다음번엔 반드 쉽게 이길 자신이 있소.” 제갈량이 웃으며 맹획을 놓아주고 다시 교전하게 했다. 이렇게 맹획을 일곱 차례 놓아주고 일곱 차례 다시 잡아들이는 칠종칠금을 한 뒤 제갈량이 또 다시 그를 풀어 주려고 하자 맹획이 이번에는 가지 않으려고 하며 이같이 찬탄했다. “공은 천위이니 남쪽 사람들이 다시는 반기를 들지 않을 것입니다!”
위문제 황초 7년 (226)
5
- 5월 17일, 황제 조비가 붕조했다.
권 71, 위기 3 힘을 비축하며 겨루다
위명제 태화 3년 (229)
2
-
여름 4월 13일, 손권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
(촉한이 오나라와 사이좋게 지내면 안된다는 의견에 대해) 제갈량이 만류했다. ”(…) 먼 앞날의 이익을 내다보며 깊이 생각하는 것은 필부의 일시적인 분노와는 다릅니다. (…)”
권 72, 위기 4 제갈량이 진몰하다
위명제 태화 6년 (232)
3
- (역자주) 《의례》〈상복전〉에 따르면 19
16세에 죽으면 장상, 1512세는 중상, 11~8세는 하상이 되고 8세 미만의 경우는 모두 상복을 입지 않는 이른바 ‘무복지상’이 된다.
위명제 청룡 원년 (233)
7
- (공손연이 오나라 장수를 죽이고 오나라의 병사들과 보물들을 모 몰수한 소식을 오주 손권이 듣고 대로하며 공손연을 공격하고자 하자) 육손이 상소했다. “폐하는 신무의 자품을 가지고 천명을 받들어 오림에서 조조를 치고, 서릉에서 유비를 치고, 형주에서 관우를 잡았습니다. 이들 세 명의 적은 당대의 웅걸이나 모두 폐하의 서슬에 좌절된 것입니다. (…) 지금 작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벽력같은 노여움을 보이는 것은 ‘수당지계’를 위배하고 만승 천자의 중임을 경시하는 것으로 이는 신이 곤혹스러워 하는 바입니다. 듣건대 ‘만 리를 가는 사람은 중도에 걸음을 멈추지 않고, 사해를 도모하는 자는 작은 것으로 큰 것을 해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
위명제 청룡 2년 (234)
10
-
(제갈량이 사마의에게 보낸 사자에게 군사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제갈량에 대해서만 물었다.) 사자가 대답했다. “제갈 공은 일찍 일어나 늦게 자고 있습니다. 장 스무 대 이상의 형은 모두 몸소 검열하고, 먹는 밥의 양은 몇 승을 넘지 않습니다.” 사마의가 사람들 앞에서 예견했다. “제갈공명이 먹는 것은 적고 일은 많이 하고 있으니 어찌 오래 견딜 수 있겠는가?”
-
(제갈량의 병이 위독하자 한주가 이복을 보내 문안하게 했는데 다녀간 뒤 며칠 후 다시 오자) 제갈량이 말했다. “고는 군이 다시 온 의도를 아오. 며칠 전 비록 하루 종일 얘기를 나눴지만 말을 다 마치지 못했으니 군이 다시 와서 그 결론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겠소. 군이 알고 싶어하는 사람은 공염(장완)이 적합할 것이오.” (…)
-
이달에 제갈량이 군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Loading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