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통감 1
사마광 저, 신동준 역, 올재
역자 해제
- 사마광은 천자인 주위열왕이 하극상을 벌인 이들 역적들을 토벌하지도 않고 오히려 이들을 제후의 반열에 올려 줌으로써 약육강식의 전국시대가 시작됐다고 판단한 것이다. 통렬하면서도 명쾌한 사론이다. 사마광은 작은 일로 간주할 수 있는 이 사건을 크게 부각시킴으로써 전국시대의 시점을 분명히 한 셈이다. 현재 대다수의 학자들이 전국시대의 시점을 주위열왕 23년으로 간주하는 것은 바로 사마광의 이런 논리를 추종한 결과다.
사마광의 봉서표
- (…) 신은 역사책에서 쓸데없이 긴 것을 잘라내어 역사에서 중심이 되는 것만을 골라내고자 했습니다. 나라의 흥망성쇠에 관한 것과 일반 백성들의 애환에 관한 것만을 골라냈습니다. 또한 선한 일로 본받을 만한 것과 악한 일로 경계해야 할 만한 것도 골라내고자 했습니다. (…) 세월이 15년이나 된 점을 생각해 주셨습니다. (…) 오로지 책 만드는 일에 종사해 (…) 신은 이제 해골같이 초췌한 모습이 되었고, 눈은 가까운 것이나 겨우 희미하게 볼 정도이고, 치아는 거의 없는 상황입니다. 정신과 지식도 쇠모해 눈앞에서 했던 일도 발길을 돌리면 곧바로 잊어버리고 맙니다. (…) 폐하는 조용하고 한가하며 즐거운 시간인 청한지연에 이 책을 때로 살펴보아 주십시오. 이어 전세의 흥쇠를 거울삼아 오늘날에 득실이 될지 여부를 생각함으로써 선한 것을 포상하고 악한 것을 배제하며 나라와 백성에게 득이 될 만한 것을 취하고 그렇지 못한 것을 버리도록 하십시오. (…)
권 1
주기 1 전국시대가 개막하다
주안왕 25년 (BC 377)
2
- 공자의 손자인 자사 공급이 위신후에게 말했다. “앞으로 군주의 국사가 날로 잘못될 것입니다.” “왜 그렇다는 것이오?” 자사가 대답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군주가 말을 하고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니 경대부들이 감히 그 잘못을 고쳐줄 수 없습니다. 경대부가 말을 하고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니 사서인이 감히 그 잘못을 고쳐줄 수 없습니다. 군신이 모두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니 아랫사람들이 모두 한목소리로 그를 현명하다고 합니다. 현명하다고 하면 복을 받고 이를 고치려고 하면 오히려 화를 입게 되니, 하면 좋은 일은 과연 어디서 생겨나겠습니까? (…)”
주열왕 6년 (BC 370)
4
- 제위왕이 즉묵 땅의 대부를 불러 칭송했다. “그대가 즉묵을 다스린 뒤로 그대를 비방하는 말이 매일 끊임없이 들려왔소. 그래서 내가 사람을 보내 이를 알아보았소. 전야가 개간되고, 백성들이 풍족하며, 관부가 깨끗하고, 동쪽 지역이 안녕했소. 그런데도 비방하는 말이 들린 것은 그대가 내 주변 사람들을 섬기면서 도움을 청하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오.” 그러고는 그에게 1만 호의 봉읍을 더 얹어 주었다. 이어 아 땅의 대부를 불러 책망했다. “그대가 아 땅을 지키게 된 이래 그대를 칭찬하는 말이 매일 끊임 없이 나에게 들려왔소. 그래서 내가 사람을 보내 이를 알아보았소. 전야가 개간되지 않고, 백성들이 가난으로 주려 있었소. 지난번에 조나라가 경 땅을 공격했을 때 그대는 이를 구하지 못했고, 위나라가 설릉 땅을 점령했을 때 그대는 이를 알지도 못했소. 그런데도 칭송하는 말이 들린 것은 그대가 많은 뇌물로 내 주변 사람을 섬기면서 좋은 이야기를 해주기를 부탁했기 때문이오.” 그러고는 이날 곧바로 아 땅의 대부와 그를 칭찬했던 자를 모두 팽살했다. 군신들이 모두 크게 두려워한 나머지 감히 말을 꾸미거나 거짓말을 하지 못하고 열성을 다해 직무를 수행하게 됐다. 제나라가 크게 다스려져 천하의 강국이 됐다.
권 3
주기 3 진나라가 동진하다
주난왕 17년 (BC 298)
3
- (조무령왕의 아우인 평원군의 식객 중 공손룡이 있었는데 그는 사물의 차별성을 지나치게 강조해 동일성을 말살하는 궤변론자로 유명하다. 노나라 공천(자고)이라는 사람이 조나라로 와서 공손룡과 노비는 귀가 세 개라는 ‘장삼이’ 주제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공손룡의 변론은 매우 정미했다. 자고가 응대할 방법이 없자 잠시 후 하직 인사를 하고 나가 버렸다. 다음 날 자고가 다시 평원군을 찾아오자 평원군이 물었다. “어제 공손룡의 변론은 참으로 웅변이었소. 선생은 어찌 생각하시오?” 자고가 대답했다. “말씀한 바와 같습니다. 노비는 거의 귀가 세 개라고 믿을 수 있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실제로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저는 군에게 묻고 싶습니다. 노비의 귀가 세 개라고 보는 것은 매우 곤란하고 실제로도 맞지 않습니다. 노비의 귀가 두 개라고 말하는 것이 쉬운 것은 물론 실제로도 맞습니다. 저는 장차 군이 쉽고도 맞는 쪽을 좇을 것인지, 아니면 곤란하고도 맞지 않는 쪽을 좇을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다음 날 평원군이 공손룡에게 말했다. “그대는 다시 자고와 논변하지 마시오. 그는 도리에 밝고 말이 적으나 그대는 말이 앞서고 도리에 뒤지니 끝내 패하고 말 것이오.”
- (또 추연이 조나라를 내방했을 때, 평원군이 그로 하여금 공손룡과 흰말은 말이 아니라는 ‘백마비마’를 논변하게 했다.) 추연이 말했다. “그 말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 번쇄한 언사를 끓어들이고, 교묘한 문사로 수식해 눈을 어지럽히고, 교묘한 비유로 궤변을 늘어놓아 사람들이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공리를 해치는 것입니다. 이리저리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면서 쟁변을 멈추지 않는 사람은 끝내 자신이 이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도리를 말하는 군자를 해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 추연은 그와 같은 논변은 하지 않습니다.”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추연을 칭송했다. 공손룡은 이 일로 인해 마침내 명성이 실추되고 말았다.
권 4
주기 4 합종연횡이 충돌하다
주난왕 31년 (BC 284)
1
- (연나라가 악의를 상장군으로 해서 진나라와 삼진의 군사를 모두 이끌고 가 제나라를 쳤고, 제나라가 대패했다. 악의는 진·한 두 나라의 군사를 돌려보내고, 위나라 군사는 옛 송나라 땅을 공략하게 하고, 조나라 군사는 하간을 점거하게 했다. 그리고 직접 연나라 군사만을 이끌고 제나라 깊숙이 진격해 들어갔다. 제민왕은 위나라로 달아났는데 거기서 불손하게 굴어서 위나라 사람들이 그를 공격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다시 추나라와 노나라로 달아났지만 거기에서도 교만함을 버리지 못해 입국이 제지당하자 거 땅으로 달아났다. 이때 초나라가 제나라를 구하기 위해 보낸 요치가 제나라의 재상이 된 후 연나라와 함께 제나라를 나눠 가질 생각으로 제민왕을 잡았다.) 요치가 제민왕에게 말했다. “하늘이 피비를 내려 옷을 적신 것은 하늘이 군주에게 경고한 것이고, 땅이 갈라져 샘물이 솟는 깊은 곳까지 이르게 된 것은 땅이 군주에게 경고한 것이고, 어떤 사람이 궐문을 향해 곡음한 것은 군주에게 경고한 것이오. 하늘과 땅과 사람이 모두 말했는데도 군주는 오히려 스스로 한 약속과 경고를 몰랐으니 어찌 그대를 주살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러고는 마침내 제민왕을 죽이고 말았다. 이를 두고 순자가 “순자” ‘왕패’에서 이같이 평했다. ”(…) 대권을 장악한 사람이 의로 나라를 세우면 왕자라 하고, 신으로 세우면 패자라 하고, 권모로 세우면 망자라고 하는 것이다. (…) 제민왕은 제나라를 강하게 만들고자 하면서 예를 닦지 않았고, 정교로써 근본을 삼지 않았으며, 성신으로 천하를 규율치 않았고, 늘 수레를 몰아 밖으로 나가 교전하는 데에만 힘썼다. 제나라는 강대했을 때 남쪽으로 초나라를 깨뜨릴 수 있었고, 서쪽으로 진나라를 굴복시킬 수 있었으며, 북쪽으로 연나라를 격파할 수 있었고, 중앙으로 송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후세에 악한 군주를 거론할 때마다 반드시 이들을 상고하게 됐다.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예로써 나라를 다스리지 않고 오직 권모술수로 다스린 데서 비롯된 것이다. (…) 선택을 잘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제압할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제압당하는 것이다.”
주난왕 36년 (BC 279)
2
- 진소양왕이 사신을 조혜문왕에게 보내 하외(황하 이남)의 민지(하남성 민지현 서쪽)에서 회합하려는 뜻을 전하게 했다. 조혜문왕이 가지 않으려고 하자 염파와 인상여가 계책을 세운 뒤 말했다. “군주가 가지 않으면 국세가 약하고 겁이 많은 조나라의 쇠약함을 보여 주는 셈이 됩니다.” (조혜문왕이 인상여를 수행하고 민지로 갔고, 인상여 덕분에 진왕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조혜문왕이 귀국하자마자 인상여를 염파보다 지위가 높은 상경으로 삼자, 염파가 불만을 표시했고 인상여를 반드시 욕을 보이겠다고 선언했다. 인상여가 이 말을 듣고 염파를 피하고 우위를 다투는 싸움을 하지 않자 인상여의 사인들이 모두 이를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인상여가 이들에게 물었다. “그대들이 보기에 염 장군과 진나라의 왕을 비교하면 누가 낫소?” “염파가 못합니다.” 인상여가 말했다. “무릇 진왕이 위압적으로 대했을 때에도 나는 진나라 조정에서 그를 꾸짖고 군신들을 욕보였소. 내가 비록 재주가 없다 해도 어찌 염 장군을 두려워하겠소. 내가 생각컨대 강한 진나라가 감히 조나라에 출병치 못하는 것은 오직 우리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오. 그런데 두 마리 호랑이가 서로 다투면 형세상 둘 다 살지 못할 것이오. 나는 이를 생각하기 때문에 먼저 국가의 급한 일을 생각한 뒤에 사사로운 원한을 고려하고자 하는 것이오.” 염파가 이 말을 듣고 사죄의 표시로 육단부형(웃통을 벗고 가시덤불을 짊어짐)의 모습으로 인상여의 집 문 앞에 와 사죄했다. 마침내 문경지교(서로 목숨을 바칠 정도의 사귐)를 나누게 됐다.
권 5
주기 5 주나라가 패망하다
주난왕 50년 (BC 265)
3
- 진나라가 조나라를 치고 세 개 성읍을 취했다. 당시 조나라는 조효성왕이 즉위했으나 태후가 국사를 주관하고 있었다. (태후가 제나라에 구원을 청하자 조혜문왕의 아들인 장안군을 인질로 보내지 않으면 도와주지 않겠다고 했는데, 태후가 이를 듣지 않자 대신들이 극력히 간했다. 이에 태후가 엄명을 내렸다.) “또다시 장안군을 인질로 보내자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이 노부가 반드시 그 얼굴에 침을 뱉을 것이다.” 이때 상경 출신 노신 좌사 촉룡이 태후를 알현하고자 했다. 태후가 대로해 촉룡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좌사공 촉룡이 가만히 다가가 자리에 앉은 뒤 사과했다. “노신은 발에 병이 나 오랫동안 알현치 못했습니다. 발병을 이유로 스스로 변명하곤 했습니다만 혹여 태후의 옥체에 무슨 불편한 일이 있을까 걱정되어 이번에 태후를 알현하고자 한 것입니다.” 태후가 말랬다. “이 노부는 간신히 연에 의지해 나다니고 있소.” “식사는 줄지 않았습니까?” “죽에 의지해 살고 있소.” 이 와중에 태후의 불쾌한 표정이 점차 풀어졌다. 좌사공이 말했다. “노신의 천식(자기 자식의 겸양어) 서기는 나이도 가장 어리고 불초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저의 몸이 쇠약해지자 사적으로 그를 더욱 가련히 여기고 사랑하게 됩니다. 원컨대 흑의(병사를 의미)에 결원이 있으면 그를 충원해 왕궁을 호외케 해 주기 바랍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청하는 바입니다.” 태후가 말했다 “잘 알겠소. 지금 나이는 얼마나 됐소?” “15세입니다. 비록 나이는 어리나 제가 전구학(죽음을 의미)을 하기 전에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당신 같은 대장부도 막내아들을 사랑하오?” “아마 부인보다 더 심할 것입니다.” 태후가 웃으며 말했다. “여인의 경우는 특히 심하오.” “노신이 가만히 생각건대 연나라로 출가한 공주인 태후의 연후에 대한 총애는 장안군보다 더한 듯합니다.” “이는 군의 지나친 생각이오. 결코 장안군만큼 심하지는 않소.” “부모가 그 아들을 사랑할 때는 그 계책이 심원해야 합니다. 태후가 연후를 출가시킬 때 연후의 발을 잡고 울며 먼 앞날을 생각해 또 슬퍼했습니다. 출가한 후에도 생각이 안 난 것은 아니어서 제사를 지낼 때면 축원하기를, ‘반드시 돌아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이 어찌 연후의 자손들이 연이어 보위를 잇기를 바라는 장구한 계책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소.” “지금부터 3대 이전만 하더라도 조왕의 자손으로 후가 된 자들 가운데 그 후계자가 아무 탈 없이 이어 내려온 사람이 있습니까?” “없소.” “이는 그들 가운데 봉후가 된 지 얼마 안 된 사람은 그 화가 본인에게 미치고, 오래된 사람은 그 화가 자손에게 미쳤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인주의 자손으로 봉후가 되면 좋지 않은 결과로 귀결된 것입니까? 직위만 높고 공이 없으며, 봉록만 두텁고 수고한 사실이 없으며, 중기만 붙들고 있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 태후는 장안군의 지위를 높이고, 기름진 땅에 봉하고, 많은 중기를 내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라에 공훈을 세우게 하지 않았다면 뜻밖의 산릉붕(군주와 왕후의 죽음을 의미)이 있을 때 장안군이 무슨 수로 조나라에 몸을 의탁할 수 있겠습니까?” “옳은 말이오. 그대가 그를 사신으로 보내겠다면 그대로 따르도록 하겠소.” 좌사공은 장안군을 위해 수레 100승을 준비시킨 뒤 곧 그를 제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제나라 군사가 이내 출병하자 진나라 군사가 물러났다.
권 6
진기 1 진시황이 즉위하다
진소양왕 52년 (BC 255)
2
- (조나라 사람 순경이 임무군과 조효성왕 앞에서 군사 문제를 논한 적이 있었다.) 조효성왕이 말했다. “군사의 요체에 관해 묻고자 하오.” 임무군이 말했다. “위로는 천시, 아래로는 지리를 얻어야 합니다. 또 적의 변동을 살피고 난 뒤 적보다 나중에 군사를 움직이거나 먼저 목적지에 이르러야 합니다. 이것이 용병의 핵심 술책입니다.” 순경이 반박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 궁시(활과 화살)를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면 명사수 예라도 화살을 적중시킬 수 없고, 수레를 끄는 여섯 말이 화합하지 못하면 조보(주목왕의 천리마를 몰았다는 전설적인 마부)라도 멀리 갈 수 없습니다. 백성이 따르지 않으면 탕왕이나 주무왕일지라도 승리를 거둘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백성을 잘 따르게 하는 사람이 용병도 잘하는 것입니다. 용병의 요체는 오직 백성을 따르게 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임무군이 이의를 제기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용병은 형세의 이로움을 귀하게 여기고 그 실행은 임기응변과 궤사(속임수)를 통해 이뤄집니다. (…) 손무와 오기는 이 방법으로 천하무적이 됐습니다. 사정이 이러한데 굳이 백성이 따르기를 기다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순경이 재반박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 그대가 중시한 것은 권모세리입니다. 어진 이의 군사란 속이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 하나라 걸과 같은 자가 또 다른 걸을 속이니, 속이는 수단의 고하에 따라 승패가 갈립니다. 만일 걸과 같은 자가 요임금과 같은 사람을 속이려 든다면 비유컨대 달걀로 바위를 치고 손가락으로 끓는 물을 휘젓는 것과 같습니다. (…) 그래서 어진 이의 군사는 상하가 한마음이 되고 삼군이 함께 힘을 쓰는 것입니다. 신하나 아랫사람은 군주나 윗사람을 대할 때 마치 아들이 부친을 섬기고, 아우가 형을 섬기듯 해야 합니다. (…) 어진 이는 사방 10리의 나라로 100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듣고, 사방 100리의 나라로 1000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들으며, 사방 1000리의 나라로 사해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리하면 반드시 총명하여 멀리 내다보고 대비하여 화순하고 친해져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 무릇 포악한 권력을 행사하는 나라의 군주에게 그 누가 찾아와 따르려 하겠습니까? (그나마 따르던 백성들이 돌아서면) 그들의 군주를 마치 묵형의 치욕을 당한 사람이 원수를 대하듯 할 것입니다. (…) 그래서 어진 이가 등용되면 나라가 날로 밝아지고, 제후들 가운데 먼저 순복하는 자는 안정되고 뒤에 순복하는 자는 위태로워지며, 그를 대적하는 자는 땅을 잃고 그를 반대하는 자는 망하는 것입니다. (…)”
- 조효성왕과 임무군이 순경에게 물었다. “훌륭한 말이오. 그렇다면 왕자(王者)의 군사에 대해 묻고자 하오. 어떤 방법을 어찌 시행해야 되는 것이오?” 순경이 대답했다. “무릇 군주가 현명하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군주가 무능하면 나라가 혼란에 빠집니다. 예를 융성하게 하고 의를 귀하게 여기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예를 간략히 하고 의를 천하게 여기면 나라가 혼란에 빠집니다. (…) 아랫사람을 쓸 수 있으면 강해지고, 그렇지 못하면 약해지니 이것이 강하고 약하게 되는 통상의 이치입니다. 제나라 사람들은 기계를 숙련되게 다루며 기교를 쓴 공격을 중시합니다. 그 기교로 말하면 적병의 수급 하나에 금 여덟 량의 치금을 주어 물건을 사게 하니 사실 승패와 무관하게 오직 수급에 따라 상을 내려 이는 상을 내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전쟁 규모가 작고 적이 취약할 경우에 구차하게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 규모가 크고 적이 견고할 경우에는 오히려 군사를 허물어뜨리고 군심을 흐트러뜨릴 뿐입니다. (…) 이들이 바로 나라를 망치는 군사입니다. 군사 가운데 이보다 더 약한 것은 없을 것이니 이는 시장에 가 돈을 주고 인부를 사서 싸우는 것과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위나라는 삼속지갑을 입은 채 12석의 궁노를 잡고 50개의 화살을 짊어지니고 하루에 100리를 가야 하는 기준에 따라 무졸을 선발하고 있습니다. 이 기준에 달하면 부세를 면제해 주고 좋은 전택을 내려줍니다. 그러나 그 기력은 몇 년 안 돼 곧 쇠퇴하는데도 부세 면제 혜택을 박탈할 수 없습니다. 다시 무졸을 선발하려 해도 이런 기준에 도달하기가 매우 어렵게 됩니다. 이런 까닭에 땅은 넓으나 그 거둬들이는 부세는 적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군사입니다. 진나라는 백성들을 좀고 험한 곳에 살게 하면서 혹독하게 부리고 있습니다. 위세로 그들을 핍박하고, 험준한 곳에 은거하게 하며, 좋은 일을 하여 포상을 받는 데에 익숙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또 형벌로써 꼼짝 못하게 억누르고, 위로부터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것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게 만들었습니다. 전쟁에서 공을 세우면 관장인 상장으로 임명했으니 5갑의 머리를 자르면 5가를 그에게 예속시켰습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을 강하게 만들어 오랫동안 유지시킬 수 있었던 제도였습니다. (…) 따라서 제나라의 기격은 위나라의 무졸을 당할 수 없고, 위나라의 무졸은 진나라의 예사(날래고 용맹한 군사)를 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그러나) 진나라의 예사는 제환공과 진문공의 절제를 당할 수 없고, 제환공과 진문공의 절제는 탕왕이나 무왕의 인의를 당할 수 없습니다. (…) 이들 몇 나라의 공통점은 모두 상을 구하고 이익을 좇는 군사들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용된 자들이 노력하는 이치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윗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제도를 지키며 절의를 존숭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제후들 가운데 정성을 다하여 절의를 사용하는 나라가 일어나면 이들 위태로운 나라들을 모두 아우르게 될 것입니다. 군사를 초청하고 모집 및 선발하며, 형세와 속임수를 숭상하고, 공리를 으뜸으로 삼으면 사람들을 점차 속되게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의와 교화는 인민을 가지런하면서도 단결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술을 구사하는 군사가 사술을 쓰는 다른 군사와 맞닥뜨리면 사술의 실력에 따라 승패가 갈리는 것입니다. 만일 사술을 쓰는 군사가 가지런하면서도 단결된 군사를 만나면 이는 마치 송곳 같은 칼로 태산을 허물려는 것과 같습니다. (…)”
- 조효성왕과 임무군이 다시 물었다. “좋은 말씀이오. 그렇다면 장수는 어찌해야 하오?” 순경이 대답했다. “지략은 의심을 버리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고, 행동은 과실을 없애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으며, 일은 후회 없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일을 하면서 후회가 없으면 그쯤에서 만족해하고, 반드시 성공을 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도, 호령, 정책, 명령은 엄히 하여 위엄을 지니게 하고, 상과 형벌을 집행할 때는 반드시 믿음을 갖게 해야 합니다. 머무는 영루와 재물 창고를 지키는 데는 주밀하면서도 단단해야 하고, 이동하여 나아가며 진퇴를 행할 때는 편안하고 신중하면서도 신속해야 합니다. 또 적을 살피며 변화를 관망할 때는 깊이 잠복해 들어가 서로를 비교하며 검증해야 합니다. 적을 만나 결전을 치를 때는 반드시 아군이 명확히 알고 있는 상황하에서 시행하고 의혹을 품고 있는 상황에서 시행해서는 안됩니다. 무릇 이를 일컬어 6술이라 합니다. 장수로 삼고 싶어 하면서도 단지 밉다는 이유로 이를 폐하는 것과 승리에 취해 태만하거나 실패한 것을 잊는 것, 안에서 위엄을 차리며 대외적으로 경박한 것, 이익만 보고 그 해로움을 고려하지 않는 행위 등은 금물입니다. 그러나 일을 할 때는 충분히 생각하고 재물을 쓸 때에는 충분히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무릇 이를 일컬어 5권(권도)이라고 합니다. 장수가 군명을 받들지 않는 세 경우가 있습니다. 군주는 장수를 죽일 수는 있으나 안전을 확보할 길이 없는 곳에 배치할 수 없고, 죽일 수는 있으나 공격해도 이기지 못할 곳에 배치할 수는 없으며, 죽일 수는 있으나 백성을 속이도록 명할 수는 없습니다. 무릇 이를 일컬어 3지라 합니다. 군명을 받아 삼군을 통솔하면서 삼군이 각기 정위치를 찾고, 군리인 백관이 절서정연하게 복무하며, 병사인 군물이 모두 안정하게 만듭니다. 그리되면 군주의 신임도 그를 기쁘게 할 수 없고 적 또는 그를 노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무릇 이러한 사람을 지신이라고 합니다. 반드시 사전에 충분히 고려하여 엄숙히 추진해 나가며, 끝맺음을 처음과 같이 신중하게 하여 처음과 끝이 한결같게 하면 이를 일컬어 대길이라 합니다. 무릇 100가지 일이 이뤄지는 것은 반드시 먼저 엄하고 신중히 하는 데 있고 실패하는 것은 반드시 함부로 태만히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엄하고 신중히 하는 것이 함부로 태만히 하는 것보다 많으면 길하고, 함부로 태만히 하는 것이 엄하고 신중히 하는 것보다 많으면 망할 것입니다. 계책이 바라는 것보다 많으면 순리대로 될 것이고, 바라는 것이 계책보다 많으면 흉할 것입니다. 공격을 수비처럼 신중히 하고, 행군을 작전하듯 과감히 하며, 전공을 세우고도 요행이 얻은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계책을 낼 때 신중히 하여 게으르지 않고, 일을 할 때 신중히 하여 태만히 하지 않으며, 관원을 대할 때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며 함부로 하지 않고, 병사들을 대할 때 존중하며 경솔하지 않으며, 적을 대할 때 교만하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 무릇 이를 일컬어 오무광, 즉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다섯 가지’라고 합니다. 6술과 5권, 3지를 신중히 행하면서 게으름이 없게 해야 합니다. 무릇 이를 일컬어 ‘천하의 장수’라고 합니다. 이리하면 천지신명과 통하게 될 것입니다.”
- 임무군이 물었다. “좋은 말씀이오. 그렇다면 왕자의 군제는 어찌해야 하오?” 순경이 대답했다. “장군은 전고를 울리다 죽고, 마부는 수레를 몰다가 죽으며, 백관은 직무를 행하다 죽고, 상대부는 군사 행렬 속에서 죽게 해야 합니다. 북소리를 들으면 나아가고, 징소리를 들으면 물러나게 해야 합니다. 순명이 우선이고, 유공은 그 다음입니다. 나아가지 말라는 명에 나아가는 것은 물러서지 말라는 명에 물러난 것과 그 죄가 똑같습니다. 노약자를 죽이지 않고, 농작물을 밟지 않으며, 항복한 자는 억류하지 않고, 항거하는 자는 사면치 않으며, 도망해 귀부한 자는 포로로 잡지 않습니다. 주살은 그 백성을 주살하는 것이 아니고 그 백성을 어지럽힌 자를 주살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흉적을 방어하기 위해 싸운다면 그들 또한 흉적입니다. 그러므로 무력에 복종하는 자는 살려주고, 무력에 맞서는 자는 죽이고, 명을 받드는데 부지런한 자는 너그러이 대해야 합니다. (…) 무릇 이를 일컬어 인사라 합니다. (…)” “참으로 훌륭한 말이오.”
- 진효가 순경에게 물었다. “선생은 군사를 논의하며 늘 말하기를, ‘인의를 근본으로 삼으니 어진 이는 사람을 사랑하고 의로운 사람은 이치를 좇는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군사는 무엇에 쓴단 말입니까? 무릇 군사가 필요한 것은 쟁탈하기 위한 것입니다.” 순경이 대답했다. “이는 그대가 알 수 있는 바가 아니오. 저들 어진 이는 사람을 사랑하오. 그러기에 사람이 백성을 해하는 것을 미워하오. 의로운 사람은 이치를 좇소. 그러기에 사람이 이치를 어지럽게 만드는 것을 미워하오. 용병은 포학을 금하고 해를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지 쟁탈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오.”
진소양왕 56년 (BC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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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진소양왕이 죽었다. 그 뒤를 이어 진효문왕이 즉위했다. 진효문왕이 생모인 당팔자를 높여 당태후로 하고 자초로 개명한 진시황의 부친 이인을 태자로 삼았다.
진효문왕 원년 (BC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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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 10월 기해, 진효문왕이 즉위식을 거행한 지 3일 만에 죽었다. 그의 아들 자초가 진장양왕으로 즉위했다. 진장양왕은 적모인 화양부인을 화양태후, 생모 하희를 하태후로 높였다.
2
- (제나라 요성을 점령한 연나라 장수를 자진하게 만든 편지를 쓴 노중련이 제왕 건의 면전에서 천거를 받아 작위를 받게 되자) 노중련이 바다로 도망치며 말했다. “부귀와 더불어 살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굴복하느니 차라리 빈천 속에서 세상을 가벼이 생각하고 제 뜻을 펼치겠다.” 이때 위안희왕이 자순에게 천하의 고사(지조가 높은 선비)에 관해 묻자 자순이 대답했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만일 그 다음쯤 되는 사람을 찾는다면 당연히 노중련일 것입니다.” “노중련은 인위적으로 그리된 것이고 본래 자연스럽게 그리된 것은 아니오.” 자순이 대답했다.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기를 그치지 않으면 마침내 군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만들면서 변치 않으면 몸에 배고, 몸에 배면 자연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진장양왕 원년 (BC 249)
1
- 여불위가 진나라의 상국이 되었다.
진장양왕 3년 (BC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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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23일, 진장양왕이 죽었다. 태자 정(진시황)이 뒤를 이어 보위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13세에 불과하여 문신후 여불위가 모든 국가 대사를 결정했다. 태자 정은 그를 높여 중부(작은 아버지)로 칭했다.
- (야사: 여불위는 진시황의 생부 - 여불위가 자신의 여인이 임신한 사실을 알면서 이 여인을 자초(이인)에게 소개했다.)
권 7
진기 2 첫 천하 통일을 이루다
진시황 26년 (BC 221)
1
- 제왕 건이 마침내 항복했다. 이로써 전씨의 제나라는 138년 만에 망했다. 진나라는 제왕 건을 공(하남성 휘현) 땅으로 옮겨 놓은 뒤 송백 사이에 방치했다. 제왕 건은 마침내 굶어 죽고 말았다. 제나라 사람들은 제왕 건이 일찍이 제후들과 합종하지 않고 간인과 빈객들의 말만 들은 나머지 나라를 망쳤다고 원망했다. (…) 신 사마광은 평한다. “종횡가의 설은 비록 반복되면 100가지의 실마리가 존재했으나 대체적인 요점을 보면 합종이 진나라를 제외한 여섯 나라에 유리했다는 점이다. (…) 가령 여섯 나라가 능히 신의로써 서로 친하게 할 수 있었다면 진나라가 비록 강포하다고 해도 어찌 그들을 패망시킬 수 있었겠는가! 무릇 삼진은 제·초의 울타리가 되어 서로 가려주고, 제·초는 삼진의 뿌리에 해당하니 형세상 서로 돕게 되어 있었다. 표리가 서로 의지하는 모습이었다. 삼진이 제·초를 공격하는 것은 곧 ‘뿌리’를 끊는 것이고, 제·초가 삼진을 공격하는 것은 스스로 ‘울타리’를 철거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울타리’를 철거하며 도적에게 눈웃음을 치며 말하기를, ‘도적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 어찌 패역한 짓이 아니겠는가!“
2
- 천하를 통일한 진왕 정은 스스로 자신의 덕이 복희·신농·황제의 삼황을 덮고 공은 소호·전욱·제곡·요·순의 오제를 능가한다고 여겼다. 마침내 ‘황제’로 칭호를 바꾼 뒤 명을 제, 영을 조라고 했다. 또 스스로를 짐으로 칭하고, 선왕 장양왕을 추존하여 태상황이라고 높이면서 명을 내렸다. “죽은 뒤 생전의 행적을 가지고 평하여 정하는 것이 시호이다. 그러나 이는 결국 아들이 아비를 논하고 신하가 군주를 논하는 것이다. 오늘 이후로 이러한 시법을 없앤다. 짐이 첫 번째 황제인 시황제가 되니 후세는 차례로 2세와 3세가 될 것이다. 만세에 이르기까지 이를 무궁히 전하도록 하라.”
4
- 진나라 승상 왕관이 진시황에게 진언했다. “연·제·초의 땅은 모두 먼 곳에 있어 왕을 두지 않으면 이를 진수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자제들 가운데 적임자를 골라 이들 지역의 왕으로 세우기 바랍니다.” (…) 정위 이사가 건의했다. “주문왕과 주무왕이 제후로 봉한 사람들 중에는 자제와 동성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후 이들은 소원해져 서로 공격하기를 마치 원수같이 했습니다. 주나라의 천자도 이를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제 해내는 폐하의 신령한 일통에 의해 모두 군현으로 만들고, 제자공신은 공적인 부세로 중상하기 바랍니다. 그리되면 아주 쉽게 통제되어 천하 사람이 모두 다른 뜻을 품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안녕을 지키는 술책입니다. 제후를 두는 것은 불편합니다.” 진시황이 이사의 건의를 받고 말했다. “천하가 함께 전투하고 쉬지 못하는 고통을 당한 것은 후왕이 있었기 때문이오. 선조의 보우를 받아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됐는데 또다시 나라를 세운다면 이는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오. 그리하고도 그들이 편히 쉬기를 바란다면 이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겠소. 정위의 견해가 진실로 옮소.” 마침내 천하를 모두 36군으로 나누고 (…) 법도를 비롯해 형(부피)과 석(무게), 장척(길이) 등의 도량형도 그 단위를 통일했다.
진시황 36년 (BC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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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군(하북성 복양현)에 운석이 떨어졌다. 어떤 사람이 운석에 글을 새겼다. “시황제가 죽고 땅이 갈라진다.” 진시황이 어사를 시켜 하나씩 불러 심문했으나 자백하는 자가 없었다. 운석을 주운 지역 인근 사람을 모두 잡아 죽인 뒤 운석을 불에 태웠다.
진시황 37년 (BC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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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시황은 죽음에 대한 언급을 꺼렸다. 군신들이 감히 사후의 일을 말하지 못 한 이유다. 병이 더욱 심해지자 진시황이 마침내 궁문의 수위관인 중거부령으로 비밀 부호와 옥새의 관리 업무를 관장하는 조고에게 명해 자신이 직접 쓴 서신을 부소에게 보내게 했다. 그는 이 서신에서 말했다. “속히 와 상사에 참여하고, 함양에서 회합해 안장을 행하도록 하라.” 서신은 이미 봉함되어 조고의 처소에 가 있었으나 아직 사자에게 부쳐지지는 않았다. 가을 7월 20일, 진시황이 사구평대(하북성 광종현 서북쪽)에서 죽었다. 승상 이사는 진시황이 밖에서 붕어해 여러 공자를 위시해 천하가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한 나머지 이를 비밀로 하여 발상하지 않았다. 그는 곧 진시황의 관을 온량거(여닫이 창문을 낸 일종의 와거)에 싣고 진시황의 총애를 입은 환관을 참승시켰다. 이르는 것마다 식사를 올리고 사안을 보고하는 백관의 주사도 이전처럼 했다. 환관이 수레 안에서 사안을 처리했다. 오직 호해와 조고, 행환 오륙 명만이 이 사실을 알았다.
- 조고는 태어난 직후 은궁이 됐다. 진시황은 그가 강건하며 힘이 세고 옥법에 통달했다는 말을 듣고 그를 발탁해 중거부령으로 삼은 뒤 호해에게 옥사에 관한 처결 일을 가르치도록 했다. 호해도 그를 특별히 아꼈다.
- 조고는 호해에게 진시황의 명을 사칭해 부소에게 주살을 명하도록 청하면서 호해를 태자로 삼고자 했다. 호해가 그 계책에 동의했다. 조고가 말했다. “승상과 더불어 모의하지 않으면 일이 이뤄지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이내 조고가 승상 이사를 만나 물었다. “주상이 부소에게 내린 서신과 부새가 모두 호해의 처소에 있습니다. 태자를 정하는 것은 군후와 나 조고의 입과 귀에 달려 있습니다. 일이 장차 어찌 될 것 같습니까?” 이사가 꾸짖었다. “어찌 나라를 망치는 말을 할 수 있오. 이는 신하 된 사람이 논의할 일이 아니오.” 조고가 다시 물었다. “군후는 재능과 모려, 높은 공로, 원망을 받지 않음, 신임 등 다섯 가지 면에서 몽념과 비교할 때 누가 더 낫습니까?” 이사가 대답했다. “그에 미치지 못하오.” 조고가 말했다. “그렇다면 부소가 즉위했을 때 반드시 몽념을 승상으로 삼을 것이고, 군후는 끝내 통후의 인장을 가슴에 품어 보지도 못한 채 향리로 돌아갈 게 분명합니다. 호해는 인자하고 후덕해 후사가 될 만합니다. 원컨대 군후가 잘 살펴 따진 뒤 결정하기 바랍니다.” 승상 이사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이내 조고와 더불어 모의했다. 거짓으로 황제의 조서를 받은 것처럼 칭해 호해를 태자로 세운 뒤 곧 부소에게 가짜 서신을 보냈다. (…) 두 사람(부소와 장군 몽념)을 사사하고 군사는 부장 왕리를 보내 맡긴다고 통고했다.
- 부소가 서신을 뜯어보고는 울며 내실로 들어가 자진하려고 했다. 몽념이 만류했다. “폐하는 밖에 있으면서 아직 태자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30만 명을 이끌고 가 변방을 지키라고 하면서 공자를 감군으로 삼았으니 이는 천하의 중임입니다. 오늘 한 명의 사자가 오자 곧바로 자진하려고 하나 그것이 거짓조서가 아닌지를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다시 물어본 뒤 죽어도 결코 늦지 않을 것입니다.” 사자가 명을 받들 것을 여러 번 재촉했다. 부소가 몽념에게 말했다. “부친이 자식에게 죽음을 내렸는데 오히려 어찌 다시 묻는다는 말이오.” 그러고는 곧바로 자진했다.
- 마침내 황제의 유해를 실은 수레 행렬이 정형(하북성 정형현)에서 구원에 이르렀다. 날씨가 무더워 온량거에서 심한 냄새가 났다. 수레 행렬을 따르는 관원들에게 명해 수레마다 1석의 포어를 실어 시체 썩는 냄새와 뒤섞이게 했다. 직도를 따라 함양에 이르러 곧바로 발상했다. 태자 호해가 보위를 이어받아 이세 황제가 됐다.
- 9월, 진시황을 여산에 장사 지냈다. 구리를 녹인 용액으로 땅속 깊은 곳의 지하수가 무덤 안으로 스며드는 틈을 막고, 기이한 그릇과 진기하고 괴상한 보물 및 모형으로 만든 일용품과 사치품을 옮겨 와 무덤에 가득 채워 넣었다. 장인들에게 명해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쇠뇌를 만들게 했다. 능을 뚫가 가까이 오는 자가 있으면 즉각 활이 쏟아지게 했다. 또 수은으로 개천과 강하, 대해를 만든 뒤 기계 작동으로 수은이 흘러 다니게 했다. 위로는 천문, 아래로는 지리를 갖췄다. 후궁으로서 자식이 없는 자는 모두 진시황을 좇아 죽게 했다. 관을 표에 안치한 뒤 어떤 사람이 말했다. “공장이 기계를 만들어 은밀히 감추었으니 그들 모두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다른 사람이 이들에게 접근하면 이 사실이 곧 누설되고 말 것이다.” 대사가 끝나자 이들을 묘 속에 가둬 버렸다.
권 8
진기 3 조고가 지록위마를 하다
이세 황제 3년 (BC 207)
10
- 당초 중승상(환관 승상) 조고는 진나라의 대권을 전횡할 생각을 품었다. 그러나 군신들이 따르지 않을 것을 우려해 먼저 이들을 시험하고자 하여 사슴을 가져다가 이세 황제에게 바치며 말했다. “이는 말입니다.” 이세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승상이 잘못 알았소. 왜 사슴을 말이라고 하는 것이오?” 그러고는 좌우에게 물었다. 어떤 이는 침묵하고, 어떤 이는 말이라고 하여 조고에게 아부하여 따랐으나 일부는 정직하게 사슴이라고 했다. 조고는 사슴이라고 말한 자들을 법망에 은밀히 떨어뜨렸다. 이후 군신들 모두 조고를 두려워하여 감히 그의 잘못을 언급하지 못했다.
- 8월, 유방이 수만 명을 이끌고 무관을 공격해 마침내 일대를 도륙했다. 조고는 이세 황제가 노해 자신까지 주살을 당할까 두려원해 거짓으로 병을 핑계대며 조회에 나가지 않았다. (…) 이세 황제는 곧 조고에게 사자를 보내 관동의 도적에 관한 일로 책양(힐책하며 나무람)했다. 조고가 두려워하여 은밀히 의붓딸의 남편인 함양령 염락 및 동생 조성과 모의했다. “주상은 나의 간언을 듣지 않다가 지금 일이 급해지자 그 화를 나에게 돌리려고 한다. 주상을 갈아치우고 부소의 아들인 자영을 새로 세우자. 자영은 어질고 검소해 백성 모두 그의 말을 잘 받아들일 것이다.” 이내 낭중령을 시켜 내응하게 하고, 큰 적이 있다고 속인 뒤 사위 염락에게 명해 관원을 소집하고 병사를 동원해 그 뒤를 쫓게 했다. (…) 낭중령과 염락이 함께 전내로 들어가 상하 사방으로 휘장이 둘러쳐진 황제의 자리를 향해 활을 쏘았다. 이세 황제가 화가 나서 곁에 있던 시종을 불렀다. 시종들이 모두 당황하여 이들과 싸우지 못했다. 곁에 환관 한 사람이 시종으로 하고 있었으나 감히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 이세 황제가 급히 안으로 들어가며 그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좀 더 일찍 나에게 말해 주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게 만들었는가?” 환관이 대답했다. “신이 감히 말을 하지 않았던 까닭에 지금까지 온전했던 것입니다. 제가 일찍 말했다면 모두 이미 주살됐을 터이니 어찌 지금에 이를 수 있었겠습니까?” 염락이 이세 황제 앞으로 나아가 그 죄를 열거했다. “족하는 교만하고 방자하며 무도하게 주살하여 천하가 모두 족하를 배반했다. 족하는 마땅히 스스로 결단하도록 하라.” 이세 황제가 청했다. “승상을 좀 만나 볼 수 있겠는가?” “안 된다.” 이세 황제가 청했다. “나는 일개 군에서나마 왕 노릇을 하고 싶다.” 허락하지 않으니, 이세 황제가 다시 청했다. “만호후라도 되고 싶다.” 이 또한 허락되지 않았으니, 다시 청했다. “처자와 더불어 검수(평민)가 된 뒤 다른 제후의 공자들처럼 살고 싶다.” 염락이 말했다. “나는 승상의 명을 받아 천하를 위해 족하를 주살할 것이다. 족하가 비록 많은 말을 했으나 나는 승상에게 감히 이를 보고할 수 없다.” 이어 군사들에게 손짓해 들어오게 하자 이세 황제가 자진했다.
- 조고가 이내 모든 대신들과 공자들을 불러 이세 황제를 주살하게 된 정황을 고했다. “진나라는 원래 왕국이었소. 시황제가 천하의 군주가 된 까닭에 황제를 칭하게 된 것이오. 지금 6국이 다시 자립하여 진나라 땅이 더욱 작아졌소. 헛된 명성으로 황제가 되는 것은 옳지 않소. 마땅히 옛날처럼 칭왕하는 것이 편할 것이오.” 그러고는 이내 자영을 황제가 아닌 진왕으로 옹립했다. 이어 이세 황제 호해를 검수의 장례 의식으로 두현(섬서성 서안시 동남쪽)의 남쪽에 있는 이궁인 의춘원에 장사 지냈다.
- 9월, 자영이 그의 두 아들과 함께 모의했다. “승상 조고가 이세 황제를 망이궁에서 죽인 뒤 군신들이 자신을 죽일까 두려워해 이내 거짓으로 의를 내세워 나를 세운 것이다. 내가 듣건대 조고는 이내 초나라와 맹약하여 진나라 종실을 멸한 뒤 땅을 나눠 갖고 관중에서 왕 노릇을 하려 한다고 한다. 지금 나에게 재계하여 종묘를 찾아보게 한 것은 장차 종묘에서 죽이려는 속셈이다. 내가 병을 핑계하고 가지 않으면 승상이 반드시 나를 찾아올 것이다. 너희들은 그가 오는 즉시 죽이도록 하라.” (…) 조고가 과연 스스로 찾아와 말했다. “종묘는 중요한 일인데 왕은 어찌하여 가지 않는 것입니까?” 자영이 마침내 재궁에서 조고를 찔러 죽이고 그의 삼족을 주멸해 전시했다.
- 유방이 군사를 이끌고 요관(섬서성 상현 서북쪽)을 우회해 괴산(섬서성 남전현 남쪽)을 넘어간 뒤 진나라 군사를 쳤다. 이들을 남전(섬서성 남전현의 남쪽)에서 크게 무찔렀다. 유방의 군사가 남전으로 진공한 뒤 다시 북쪽으로 가 교전했다. 진나라 군사가 크게 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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