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통감 2
사마광(지은이), 신동준(옮긴이), 올재
권 9
한기 1 유방이 큰 뜻을 품다
한고제 원년 (BC 206)
2
- 유방이 서진하여 함양으로 들어갔다. 유방은 진나라 궁실과 유장, 구마, 중보, 1000여 명의 부녀 등을 보고 이내 머물러 살고 싶어 했다. 번쾌가 간했다. “패공은 천하를 갖고 싶습니까? 아니면 부잣집 영감이 되고 싶습니까? 무릇 이들 사치하고 화려한 물건은 모두 진나라를 망하게 한 것들인데 패공은 이것들을 어디에 쓰려는 것입니까? 패공은 급히 파상으로 돌아가십시오. 궁중에 더 이상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권 10
한기 2 한신이 두 마음을 품다
한고제 3년 (BC 204)
1
- 한신이 묻고 광무군이 답했다. ”(…) 용병은 진실로 먼저 성세를 드러낸 후 실력을 행사해야 하니 바로 이를 말한 것입니다.”
4
- 이를 두고 훗날 순열은 ‘한기’에서 이같이 평했다. ”(…) 그래서 이르기를, ‘권도(임기응변의 방도)는 미리 확정할 수 없고, 국면의 변화는 미리 모의할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이다. 시기에 따라 옮기고 사물의 변화에 따라 변하는 것이 바로 책략 확립의 관건이다.”
권 11
한기 3 평민 황제가 등장하다
한고제 5년 (BC 202)
1
- 항우가 말했다. “내가 듣건데 한나라에서 나의 수급을 1000금과 성읍 1만 호에 산다고 하니 내가 너를 위해 덕을 베풀겠다.” 그러고는 목을 찔러 스스로 죽었다.
- 양웅은 ‘법언’에서 이같이 평했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항우가 해하에서 패해 바야흐로 죽게 되었을 때 하늘이 나를 망하게 했다고 말했다고 하니 이는 믿을 만한 것인가’라고 했다. 내가 답하기를, ‘한왕은 군신들의 책략을 다 썼고, 군책은 군중들의 역량을 다 쓰게 했다. 다른 사람의 힘을 다 쓰게 하는 사람은 승리하고, 스스로 자신의 역량을 다 쓰는 사람은 패하는 것이다. 하늘이 이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라고 했다.”
6
- 2월 3일, 한왕 유방이 범수의 북쪽에서 황제에 즉위했다.
10
- 황제 유방이 낙양의 남궁에서 주연을 베풀며 물었다. ”(…) 내가 천하를 차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또 항씨가 천하를 잃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 황제 유방이 말했다. “공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오. 무릇 군대의 막사에서 계책을 세워 1000리 밖에서 승리를 결정짓는 일은 내가 자방만 못하오. 국가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위무하고, 군량을 공급하면서 양도를 끊이지 않게 하는 일은 내가 소하만 못하오. 100만의 군사를 연합해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빼앗는 일은 내가 한신만 못하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뛰어난 인재들이오. 그러나 나는 이들을 임용할 수 있었오. 이것이 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이오. 항우에게는 오직 한 명의 범증이 있었으나 그조차 쓰지 못했오. 이것이 그가 나에게 패한 까닭이오.”
한고제 6년 (BC 201)
1
- 고황제가 한신에게 물었다. “나와 같은 사람은 군사를 얼마나 거느릴 수 있겠소?” 한신이 대답했다. “폐하는 10만명을 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어떠하오?” “신은 많을 수록 좋습니다.” “그대는 ‘다다익선’이라고 하면서 어찌하여 나에게 붙잡히게 됐소?” “폐하는 병사를 거느리는 장병에는 능하지 못해도 장수를 거느리는 장장에 능합니다. 이것이 저 한신이 폐하께 붙잡힌 이유입니다. (…)“
2
- 공신들이 소하의 책봉에 불평을 하자 고황제가 말했다. “그대들은 수렵을 아는가? 무릇 수렵할 때 짐승이나 토끼를 쫓아 죽이는 것은 사냥개이고, 사냥개를 풀어주며 짐승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 것은 사냥꾼이다. 지금 그대들은 한낱 달려가는 짐승을 잡을 수 있을 뿐이다. 이는 사냥개의 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소하는 사냥개를 풀어 지시를 했으니 이는 사냥꾼의 공이라 할 수 있다.” 군신 모두 감히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8
- 고황제의 부친인 태공을 높여 태상황이라고 했다. (역자 주 : 진시황 사후 유방은 사상 두 번째로 천하통일을 이뤄 황제를 칭한 뒤에도 평민들처럼 5일에 한 번씩 부친 태공을 알현했다. 태공의 집안을 관리하는 사람이 태공에게 말하기를, ”(…) 아무리 황제의 부친이라도 신하인 까닭에 황제로 하여금 알현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다. 얼마 후 유방이 알현차 왔을 때 태공이 대문 앞을 청소하며 유방을 영접했다. 유방이 크게 놀라 그 이유를 알고는 태공을 ‘태상황’으로 높였다. 이는 중국의 전 역사를 통틀어 보위에 오르지 않고도 ‘태상황’이 된 유일무이한 경우이고, 생전에 ‘태상황’이 된 최초의 사례이다.)
9
- 진나라가 멸망하자 흉노가 다시 조금씩 남쪽으로 내려와 황하를 건넜다. 이 때는 동호가 강했고, 월지도 번성했다. 동호는 흉노 태자 묵돌이 자립해 선우가 됐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내 사자를 보내 청했다. “두만(묵돌의 부친)이 생전에 타던 천리마를 갖고 싶다.” 흉노 선우 묵돌이 군신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군신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이는 우리 흉노의 보마이니 주지 마십시오.” 묵돌이 말했다. “어찌 사람들과 더불어 땅을 이웃하면서 한 마리의 말을 아낄 것인가?” 그러고는 말을 주었다. 얼마 후 동호가 또 청했다. “선후의 연지(흉노 선우의 부인) 가운데 한 명을 갖고 싶다.” 좌우 군신들이 하나같이 화를 내자, 묵돌이 말했다. “어찌 사람들과 더불어 땅을 이웃하면서 한 명의 여자를 아끼겠는가?” 마침내 총애하던 연지를 동호에 주었다. 동호와 흉노 사이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버려진 땅이 1000여 리나 됐다. 교만해진 동호의 왕이 묵돌에게 청했다. “이곳은 버린 땅이다. 이곳을 갖고 싶다.” 묵돌이 군신에게 묻자 어떤 사람이 말했다. “그곳은 버린 땅이니 주어도 그만이고 주지 않아도 그만입니다.” 묵돌이 대로했다. “땅은 나라의 근본인데 어찌하여 그것을 준던 말인가?” 그러고는 버린 땅을 주자고 말한 자들을 모두 참한 뒤 동호 부락을 습격하여 마침내 동호를 멸했다.
10
- 숙손통이 고황제에게 말했다. ” 무릇 유자는 함께 나아가 탈취하기는 어려우나 더불어 수성할 수는 있습니다. 원컨대 신은 노나라 땅의 제생을 징소하여 신의 제자들과 더불어 조정의 의례를 함께 일으키고자 합니다. (…) 고례를 두루 채택한 뒤 진조의 의례를 섞어 새롭게 만들어 내고자 합니다.” 고황제가 말했다. “한 번 만들어 보도록 하시오. 다만 알기 쉽고 내가 실행할 수 있는지를 헤아려 만들도록 하시오.”
한고제 7년 (BC 200)
5
- (소하가 미앙궁을 장려하게 지은데 대해) 신 사마광은 평한다. “왕자는 인의를 미덕으로 삼고, 도덕을 위세로 삼는다. 궁실 영건으로 천하를 진압하고 복종시킬 수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 창업하여 전통을 세우는 군주는 능히 절약과 검소를 몸소 실행해 자손들에게 보여 주는데도 먼 후대인 그 말류는 음란 사치하고 허황된 일에 빠지는 법이다. (…)”
권 12
한기 4 토사구팽이 난무하다
한고제 11년 (BC 196)
1
- (한신의 죽음에 대해) 신 사마광은 평한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 어떤이는 말하기를, ‘한신은 앞장서 한나라 건설의 대책을 세웠고, 고조와 더불어 한중에서 기병하여 삼진을 평정했다. 마침내 분병하여 북쪽으로 나아가 위왕 위표를 사로잡고, 대 땅을 취했으며, 조나라를 무너뜨리고, 연나라를 위협했다. 동쪽으로 나아가 제나라를 공격해 이를 소유하고, 다시 남쪽으로 나아가 초나라를 해하에서 멸망시켰다. 한나라가 천하를 얻은 것은 모두 회음후 한신의 공이다’라고 한다. (…) 오랫동안 실직으로 불만을 품다가 마침내 패역에 빠진 것이다. (…) 이 어찌 고조가 한신을 배신한 것이 아니겠는가? (…) 그러나 한신 역시 죄를 받을 만한 일을 했다. (… 제나라를 멸망시킨 뒤 스스로 왕이 됐고 초나라 공격을 기약했음에도 끝내 오지 않은 점 등 …) 무릇 시기를 틈타 이익을 취하는 시정잡배의 속셈이다. 공로를 나누며 은혜와 덕에 보답하는 것은 선비와 군자의 마음이다. (…) 그래서 태사공 사마천도 이를 두고 평하기를, ‘가령 한신이 도를 배워 겸양하여 자신의 공을 자랑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지 않았으면 거의 자신의 뜻을 이뤘을 것이다. (…) 그런데도 이런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않은 까닭에 천하가 이미 안정됐는데 이내 반역을 모의해 종족이 주살하여 멸절됐다. 이 또한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는가?‘라고 한 것이다.”
9
- 육가가 늘 고황제의 면전에서 말할 때마다 시서를 들먹이자 고황제가 욕을 했다. “너의 어르신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는데 시서를 어디에 써먹는단 말인가?” 육가가 말했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을지라도 어찌 계속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 문무병용이 장구히 보전하는 술책입니다. 옛날 오왕 부차와 지백, 진시황은 모두 무력만을 사용해 패망했습니다. (…)” 고황제가 부끄러운 기색을 드러냈다. “나를 위해 진나라가 천하를 잃고 내가 천하를 얻은 이유와 예부터 성공하고 실패한 나라의 이야기를 한번 저술해 주시오.” 육가가 국가존망의 징후를 약술했다. 모두 열두편이다. 그 책을 ‘신어’라고 했다.
한고제 12년 (BC 195)
11
- (고황제의 상처가 더욱 심해지자) 여후가 양의를 맞아들여, 의원이 들어와 만나 보았다.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고황제가 욕을 했다. “나는 포의로 있을 당시 3척 검을 들고 천하를 차지했다. 이는 천명이 아니겠는가? 명운은 하늘에 있으니 비록 편작(전설적인 명의)이 있은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마침내 그에게 더 이상 병을 치료치 못하게 한 뒤 황금 50근을 내려 그냥 물러가게 했다. (여후가 이후 상국 후보에 대해서 묻고, 그 다음을 묻고, 다시 그 다음을 묻자) “그 이후의 일은 그대가 알 수 있는 바가 아니오.” 여름 4월 25일 고황제 유방이 장락궁에서 붕어했다.
13
- 당초 고황제는 학문을 연마하지 않았으나 성정이 지혜롭고 사리에 밝으며 계략을 좋아했다. 기꺼이 남의 말을 들을 줄 알았고, 감문이나 수졸을 만나도 옛 친구처럼 대했다. 최초로 민심에 순응하기 위해 약법삼장을 만들었다. 천하가 평정되자 소하에게는 율령을 편차하고, 한신에게는 군법을 펴내게 했다. 장창에게는 법식 규정인 장정을 정하게 하고, 숙손통에게는 예의를 만들게 했다. 또한 공신들과 부신을 나눠주며 서약을 하여 단서와 철계로 만들어 금궹에 넣은 뒤 석실에 두었다가 종묘에 수정하게 했다. 비록 매일 일이 너무 많아 일일이 검토할 여가가 없었으나 그 나라 건설의 기본 설계 규모가 크고 원대했다.
한혜제 2년 (BC 193)
6
- 소하가 병이 들자 한혜제가 친히 가서 문병하면서 그 기회를 이용해 소하에게 물었다. “군의 백세후 누가 군을 대신할 수 있겠소?” 소하가 대답했다. “신하를 아는 사람으로 군주만 한 사람이 없습니다.” “조참은 어떻소?” 소하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황제가 그를 찾아냈으니 신은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 가을 7월 5일, 소하가 훙거했다. 소하는 생전에 전택을 고를 때 반드시 궁벽한 곳을 선택해 거주리로 삼으면서 담장과 지붕을 수축하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후손이 현명하면 나의 절검을 배울 것이고, 현명하지 못할지라도 세가에게 빼앗기지는 않을 것이다.”
- (조참이 질박하고 어눌하고 중후한 인물만 등용하고 업무를 보지 않고 술만 마시는 것에 대해 혜제가 조참을 나무라자) 조참이 관모를 벗고 사죄했다. “폐하가 스스로 살피건대. 성무의 면에서 고황제와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짐이 어찌 감히 선제를 바라볼 수 있겠소.” “폐하가 보건대 신과 소하 가운데 누가 더 현명합니까?” “그대는 아마 미치지 못할 것이오.”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고황제와 소하는 천하를 평정하면서 법령을 밝게 했습니다. 지금 폐하도 팔짱을 끼고 편히 쉬고 저 조참 등도 직분을 지키며 고황제와 소하가 만들어 놓은 것을 지키며 잃지 않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해제가 찬탄했다. “훌륭한 말이오.” 조참이 상국이 된 지 3년이 지나자 백성들이 노래를 지어 칭송했다.
한혜제 7년 (BC 188)
4
- 가을 8월 12일, 혜제가 붕어했다. (…) 혜제를 안장한 뒤 혜제의 후궁 소생인 소제 유공이 즉위했으나 나이가 너무 어렸다. 마침내 태후가 조정에 나아가 천자의 대권을 행사했다.
권 13
한기 5 한문제가 즉위하다
한고후 3년 (BC 185)
1, 2, 3
- 여름, 강수와 한수가 넘쳐 4000여 호가 유실됐다.
- 가을, 별들이 낮에 보였다.
- 이수와 낙수가 넘쳐 1600여 호가 유실됐다. 여수가 넘쳐 800여 가구가 유실됐다.
한고후 8년 (BC 180)
4
- 7월 30일, 여태후가 붕어했다.
6
- 대(代)왕 유항이 빈주의 예에서 주인의 자리에 앉는 서향을 하여 세 번 겸양하고, 또 군신의 예에서 군주의 자리에 앉는 남향을 하여 두 번 겸양한 뒤 마침내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 양왕 유태와 회양왕 유무, 항산왕 유조, 후세제 유홍을 그들의 저택에서 죽이게 했다. 대왕 유항이 전전으로 돌아와 자리에 앉은 뒤 밤중에 하조해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다.
한문제 전(前)원년 (BC 179)
※ 한나라는 한무제 때부터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한문제와 한경제 때는 중대한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개원을 하며 기년을 다시 시작한 바 있다. 통상 재위 9년이 넘어 10년째가 되는 해를 다시 원년으로 삼아 개원하는 관행이 있었다. 《사기》<진본기>에 따르면 진나라는 진혜문왕 14년(BC 311)에 왕호를 처음으로 사용하면서 이 해를 혜문왕 원년으로 개원한 바 있다. 개원이 이뤄진 해의 앞선 기간을 전원, 그 이후의 시기를 다시 중원 및 후원 등으로 표현한 것은 후대의 사가들이 서사의 편의를 위해 채택한 것으로, 단지 선후의 명칭을 덧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문제의 재위 전 기간을 전원과 후원, 한경제의 재위 전 기간을 전원과 중원 및 후원으로 구분한 게 그렇다. 사가들은 전원과 중원 및 후원을 전•중•후로 약칭해 기술했다.
4
- “법이라는 것은 백성을 다스리기 위한 올바른 기준이다. 법을 범했으면 이를 죄로 다스려야 마땅하나 죄 없는 부모, 처자, 형제와 자식까지 연루시켜 잡아들이는 것은 옳지 않다. 짐은 그 법을 채택하지 않겠다.”
10
- (천리마를 바친 사람에게 황제가) “난기(황제를 상징하는 깃발)를 앞세우고, 속거(소속된 수레)가 뒤따르면 길사로 가는 길행은 하루에 50리, 군사를 이끌고 가는 사행은 30리를 간다. 짐이 천리마를 타고 홀로 어디를 앞서 가겠는가?” 그러면서 말을 돌려주고 여비를 주어 보냈다. 이어 이같이 조서를 내렸다. “짐은 헌물을 받지 않겠다. 사방에 영을 내려 헌물을 바치지 못하게 하라.”
12
- 황제가 우승상 주발에게 물었다. “천하에서 1년에 얼마나 많은 사건을 판결하는가?” 주발이 알지 못하는 사실을 사과했다. 황제가 또 물었다. “1년에 전과 곡식이 얼마나 들어오는가?” 주발이 또다시 알지 못하는 것을 사과했다. 당황하고 부끄러워 등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 황제가 이번에는 좌승상 진평에게 물었다. 진평이 대답했다. “주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주관하는 사람이 누구요?” 진평이 말했다. “사건의 판결은 그 책임을 정위가 지고, 전곡은 그 책임을 치속내사가 지고 있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갖가지 일에 그것을 주관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대가 주관하는 일은 무엇이오?” 진평이 사과했다. “폐하는 신의 노둔을 모른 채 재상의 자리를 맡겼습니다. 재상은 무릇 위로는 천자를 보필하고 음양을 순조롭게 다스려 사시에 순응하고, 아래로는 만물의 마땅함을 이뤄야 합니다. 또한 밖으로는 네 오랑캐와 제후들을 진무하고 안으로는 백성들을 친히 귀부하게 하고, 경과 대부 들에게 각기 그 직책을 책임지도록 해야 합니다.” 황제가 이내 훌륭하다고 말했다. (… 주발은 자신이 진평에 많이 못 미침을 깨닫고 물러남을 청했고 황제가 허락해서 우승상에서 면직되었다.)
한문제 전2년 (BC 178)
7
- “농사는 천하의 근본이고, 백성들이 믿고 살아갈 바이다. 그런데 백성들이 본업에 힘쓰지 않고 상공업 등의 말업을 섬기기 때문에 사는 것이 어려워진다. 짐은 그렇게 되는 것을 근심한다. 지금 짐은 군신들을 이끌고 이들에게 농사를 권한다. 천하의 백성들에게 올해 전조의 반을 내려 준다.”
권 14
한기 6 가의가 상소하다
한문제 전3년 (BC 177)
9
- (장석지가 황제를 수행해 호랑이를 풀어 놓은 우리인 호권에 갔을 때, 황제가 호랑이 우리를 관리하는 총책에게 여러 사항을 질문했는데 답하지 못하고 오히려 한참 아래 실무자인 색부가 아주 자세히 대답하자 황제는 그 색부를 몇 단계 승급시키려 했다. 이에 대해 장석지가 황제에게 말하길) “무릇 강후와 동양후는 어른다운 사람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은 일찍이 시무에 대해 제대로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입에 발린 말을 재빨리 하는 색부를 본받으라고 하는 것입니까? 또한 진나라는 붓을 잡은 관원들에게 일을 맡겨 재빠르고도 가혹하게 살피기만을 다투어 경쟁했는데 그 폐단으로 헛된 문사만을 갖추고 알맹이는 없었습니다. 그러고는 그 허물을 들으려 하지 않자 점차 흙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폐하가 색부의 말재주를 가지고 그를 몇 단계 뛰어넘게 승급시키니 신은 천하 사람이 풍문을 좇아 흩어지고 다투어 말재주만 피우며 그 알맹이는 없게 될까 걱정입니다. 무릇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본받으려는 것은 그림자가 비추는 것처럼 빠르니 천거하는 조치에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훌륭하오.” 그러고는 황제가 색부를 상림령에 제수하지 않았다.
- (장석지가 황제를 수행하여 파릉에 건설 중인 황제 자신의 묘를 시찰하러 갔을 때, 황제가 자신의 관과 그 밖의 곽을 잘 막는 방법을 군신들에게 말했다) “아, 북산의 돌로 곽을 만들고, 모시와 샘 조각을 써 그 사이를 옻으로 붙인다면 어찌 움직일 수 있겠는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장석지가 말했다. “그 무덤 속에 사람들이 갖고 싶어 하는 보물이 들어 있다면 비록 이 남산을 구리로 다 싸서 견고하게 만든다 할지라도 틈새가 있을 것이고, 그 무덤 안에 사람들이 갖고자 욕심 부릴 만한 것이 없다면 비록 돌로 된 곽이 없을지라도 어찌 근심하겠습니까?” 황제가 훌륭하다고 말했다. 이해에 장석지는 정위가 됐다.
- (그 외 장석지는 법을 객관적이고 일률적으로 집행하는데 힘썼다. 황제에 폐를 끼쳤다고 벌금형을 사형이라 하지 않고, 종묘에 누를 끼쳤다고 사형을 멸족시키라 하지 않았다.)
한문제 전6년 (BC 174)
3
- 한나라 사자 가운데 어떤 이가 흉노의 습속에 예의가 없음을 비웃었다. 중항열은 한나라 사자에게 추궁했다. “흉노는 약속을 간단히 하고 쉽게 실행합니다. 군신 간의 예절은 간단해도 오래갑니다. 하나의 나라에서 시행되는 정치가 마치 한 몸과 같습니다. 흉노는 비록 혼란하지만 반드시 선우의 자손을 세웁니다. 중국은 예의가 있다고 하지만 친속이라도 조금만 멀어지면 서로 죽이고 빼앗고, 왕조의 성이 바뀌어 새 왕조가 세워져도 모두 이를 좇는 무리입니다. (…)”
권 15
한기 7 흉노가 발호하다
한문제 전12년 (BC 168)
3
- 태자궁의 총책인 태자가렬 조조가 황제에게 상주했다. “성스러운 주군이 백성들이 주리거나 추위에 떨지 않게 하는 방법은 군주가 직접 밭을 갈아 먹이고 길쌈도 하여 입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원과 재화를 생산하도록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 주리고 추우면 염치를 생각하지 못합니다. (…) 무릇 배가 주리는데도 먹을 것을 얻지 못하고 피부가 찬데도 옷을 얻어 입지 못하면 아무리 자애로운 부친일지라도 그 아들을 보호할 수 없는데 어찌 군주가 그 백성을 거느릴 수 있겠습니까? 현명한 군주는 그런 이치를 알기 때문에 백성을 농상에 힘쓰게 하고 부렴을 적게 거두면서 저축을 넓히고, 창고를 가득 채워 수재와 한한재에 대비합니다. 그래야 백성들을 얻어 거느릴 수 있습니다. (…) 백성들이 이익을 좇는 것은 마치 물이 아래로 흘러가면서 사방으로 흩어져 아무것도 가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 지금 다섯 식구를 가진 농가라면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두 사람은 넘을 것이나 그들이 경작할 수 있는 것은 100무를 넘지 못할 것입니다. (…) 봄에 밭을 갈고 여름에 김을 매며 가을에 수확하고 겨울에 저장해 두는데 또한 땔감을 베어야 합니다. 게다가 관부를 수선해야 하고 요역에도 나가야 하니 봄에도 바람과 먼지를 피할 수 없고, 여름에는 더위를 피할 수 없으며, 가을에는 찬 비를 피할 수 없고, 겨울에도 추위에 얼어 터지는 것을 피할 수 없어, 사계절 내내 하루도 편히 쉴 날이 없습니다. 또한 그러는 중에 사사로이 사람을 보내고 맞이하며, 조문하고 위문할 뿐 아니라 어린아이를 기르고 돌보아야 합니다. 고생스러움이 이와 같은데 거기에 따로 수재와 한재를 만나고 급한 정치적인 징발이나 갑작스런 부세가 있고, 부렴도 때를 가리지 않고 부과되고, 아침에 명을 내렸다가 저녁에 다시 고칩니다. 그러면 저축한 것이 있던 사람은 물건을 반값에 팔아 버리고, 없는 사람은 두 배의 이자를 물고 돈을 빌립니다. 결국 어떤 사람은 밭이나 집을 팔고 심지어 처자를 팔아서 채무를 상환합니다. 그러나 장사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큰 집들은 저축해 놓고 이자를 받고, 작은 집에서는 앉아서 물건을 늘어놓고 판매를 합니다. 그들은 매일 도시에서 놀이를 하다가 위에서 급하게 쓸 일이 있으면 편승해 팔 때는 반드시 배를 받습니다. 그 집의 남자들은 밭을 갈거나 김을 매지 않고 여자들은 길쌈을 하지 않는데도 입는 옷은 전부 무늬 있는 것이고 먹는 것은 늘 기름진 고기입니다. (…) 이렇게 얻은 부유함을 가지고 왕후들과 교류해 힘은 관원의 세력보다 더하고, 이로써 서로에게 기울어집니다. (…) 바야흐로 오늘날 힘써야 할 일은 백성들이 농사에 힘쓰게 하는 것 뿐입니다. (…)”
한문제 전13년 (BC 167)
2
- 원래 진나라 때 축관은 비축을 갖고 있다가 재난이 생기면 갑자기 이를 아랫사람들에게 옮겨 놓았다. (역자 주: ‘축’은 귀신에게 고하는 사람을 말한다. ‘축관’은 비밀스럽게 만든 저주문인 ‘비축’을 갖고 있다가 재난이 있을 때 황제의 허물을 신하에게 옮기는 기도를 올려 그 신하가 재앙을 대신하게 했다.) 여름에 황제가 조서를 내렸다. “천도에 관한 보고를 들어 보니 화라는 것은 원망을 쌓는 데서 일어나고, 복은 덕을 베푸는 것과 관계돼 나타난다고 한다. 백관들의 잘못은 마땅히 짐의 잘못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런데 비축하는 관원이 아랫사람에게 나의 허물을 옮기려고 한다면 이는 나의 부덕함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짐은 이런 제도를 취하지 않겠다. 그 제도는 폐지하라.”
3
- (제나라 태창령 순우의가 죄를 지어 형벌을 받게 됐을 때 그의 어린 딸 제영이 부친 대신 자신이 벌을 받을테니 부친의 형벌과 죄를 사하여 달라는 서신을 올렸다.) 천자가 그 뜻을 가련하고 슬프게 생각해 5월에 조서를 내렸다. “《시경》<대아•형작>에서, ‘자상한 군자여, 그대는 백성의 부모라네’라고 했다. 노늘날 사람들에게 허물이 있다면 아직 교화를 다 시키지 못하고 형벌을 내리는 것이다. 혹 행실을 고쳐 착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길이 없으니 짐은 이를 매우 가련하게 생각한다 무릇 형벌이 몸의 지체를 자르거나 피부를 찢어 놓는다면 죽을 때까지 회복될 수 없다. 얼마나 고통스럽고 부덕한 일인가? 이것이 어찌 백성의 부모 된 사람의 뜻이겠는가? 육형을 없애고 이를 다른 형벌로 바꾸도록 하라. (…)”
한문제 후원년 (BC 163)
3
- 황제가 조서를 내렸다. “최근 몇 년 동안 풍년이 들지 않았다. 수재와 한재, 질병 같은 재앙이 있었으니 짐은 이것이 매우 걱정스럽다. 짐은 어리석어 그 이유를 몰라 허물이 무엇에 있는지 알 수 없다. (…) 어찌하여 백성들이 먹을 것이 모자라는가? 농사짓는 땅이 적어진 것도 아니고, 백성의 수가 더 많아진 것도 아니다. 인구수를 가지고 토지를 계산해 보면 오히려 옛날에 비해 더 여유가 있는데도 먹는 것이 많이 부족하니 그 허물은 어디에 있는가? (…) 나는 적든가 크든가 정확한 그 이유를 찾지 못했으니, 승상과 열후와 이천석의 관원과 박사들은 이를 의논하도록 하라. 백성들을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의견을 모으고 멀리 생각하되 숨기는 바가 없도록 하라!”
한문제 후6년 (BC 158)
1
- 황제가 직접 군사를 위로하려고 파상과 극문에 있는 군영으로 곧장 말을 달려 들어갔다. 장군이 말에서 내려 영접하고 배웅했다. 이어 세류에 있는 군사들이 있는 영채로 가자 (…) 천자의 선발대가 이르렀으나 들여보내 주지를 않았다. 선발대가 말했다. “천자가 곧 도착하실 것이다.” 군문을 지키는 도위가 이 말을 듣고 대답했다. “장군령에 이르기를, 군중에서는 장군의 명을 듣는 것이지 천자의 조서를 듣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어쩌지 못하고 있는데 황제가 도착했다. 역시 들여보내 주지를 않았다. 황제가 사자를 시켜 신표를 들고 가 장군에게 전하게 했다. “내가 영내로 들어가 군사들을 위무하고자 한다.” 주아부가 말을 전했다. “영문을 열도록 하라.” 이때 비로소 영루를 지키는 군사가 영문을 열었다. 그러나 영문을 지키던 병사가 황제를 모시는 수레꾼과 기병들에게 말했다. “장군이 말하기를, 군중에서는 말을 달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천자는 말고삐를 당겨 잡고 천천히 갔다. 군사들이 주둔한 영채에 이르니 장군인 주아부가 무기를 든 채 읍을 했다. “갑옷을 입은 군사는 절을 하지 않는 것이니 청컨대 군례로서 알현하게 해 주십시오.” 감동을 받은 천자는 얼굴을 고치고 수레의 횡목을 잡고 답례하며 사람을 시켜 미안하다는 뜻을 전하게 했다. “황제가 장군을 경건하게 위로하고자 하오.” 이렇게 예를 마치고 돌아갔다. (…) 황제가 기쁜 얼굴로 말했다. “아,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장군이다. 방금 지나왔던 파상의 극문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는 아이들 장난 같다. 그곳의 장수들은 정말로 습격을 받으면 포로가 될 듯하다. 그러나 주아부가 있는 곳에 이른다면 감히 범접이나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칭찬을 오래도록 했다. (…) 황제가 주아부를 중위에 임명했다.
한문제 후7년 (BC 157)
1
- 여름 6월 1일, 황제가 46세의 나이로 미앙궁에서 붕어했다. 유언으로 남긴 조서에서 이같이 말했다. “짐이 듣건대, ‘대개 천하의 만물이 싹이 터 자라면 죽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했다. 죽는다는 것은 천지의 이치이고 만물의 자연스러움이니 어찌 심하게 슬퍼할 일인가? 지금 시대는 모두 사는 것만 좋아하고 죽기는 싫어하면서 장례를 후하게 치르느라 생업까지 중단하고 복상을 무겁게 하여 사람을 다치게 하고 있다. 나는 그리하지 않겠다. (… 여러가지 다른 장례 절차 및 의식을 간단히 하라는 내용 …) 기타 이 조령 가운데 없는 것은 모두 이 조령의 뜻에 비춰 일을 처리하라. 이를 천하에 널리 알려 짐의 뜻을 분명히 알게 하라. 파릉 소재의 산과 내는 그 원래대로 유지할 것이고, 고치지 말라. 부인 이하 소사에 이르기까지 집으로 돌려보내라.”
- 한문제는 즉위한 뒤 23년 동안 궁실과 원유, 거기, 복어를 조금도 늘이지 않았다. 불편을 줄 만한 것이 있으면 바로 풀어 백성들을 이롭게 했다. (…) 또한 늘 검은색의 거친 옷감으로 된 옷을 입고, 그가 마음으로 아끼던 신 부인의 옷도 땅에 끌리지 않게 했다. (…) 파릉을 만들 때도 모두 질그릇 제품으로만 하고, 금•은•동•주석으로 장식하지 않게 했다. (…) 오직 덕으로써 백성들을 교화하기에 힘썼다. 천하가 안녕했고, 집집마다 풍족하고 사람마다 만족해 후세에 그를 따라잡을 수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권 16
한기 8 오초칠국이 반기를 들다
한경제 전3년 (BC 154)
5
- 초나라 원왕 유교는 독서를 좋아해 노나라의 신공과 목생, 백생과 더불어 부구백에게서 《시경》을 배웠다. 이후 초나라의 왕이 되자 이 세 사람을 중대부로 삼았다. 목생이 술을 좋아하지 않아 원왕은 술을 마실 때마다 항상 묵생을 위해 예주(밀을 적게 하고 쌀을 많이 넣어 만든 감주)를 마련했다. 이후 그의 아들인 이왕 유영과 손자인 유무도 즉위해 왕이 된 뒤 그래했으나 뒤에 가서는 이내 이렇게 마련해 두는 것을 잊었다. (… 목생이 이를 보고 떠날 때가 됐다고 판단하자 신공과 백생이 …) “그대는 먼저 돌아가신 왕의 은덕을 생각하지 않는단 말인가? 지금의 왕이 하루아침에 작은 예의를 잃었다고 하여 어찌 이리할 수 있단 말인가?” 목생이 대답했다. “《주역》에 이르기를, ‘기미를 아는 것이 바로 신이다. 기미라는 것은 움직임이 아주 미미하지만 길흉을 미리 나타내 보인다. 군자는 기미를 보고 행동하는 것이지 종일토록 기다리지 않는다’고 했소. 먼저 돌아가신 왕이 우리 세 사람을 예우한 것은 군신의 도가 이 나라에 있게 하기 위함이었소. 지금 이를 소홀히 하는 것은 그 도를 잊은 것이오. 도를 잊은 사람과 어찌 오래 머물러 있으면서 구구하게 예가 어떻다는 말을 하겠소.”
- (한문제 때 황태자 유계 - 후일의 한경제가 오나라 태자 유현을 죽였고 그로 인해 오왕이 병을 핑계로 년간 두 번하는 황제 알현(봄은 조, 가을은 청)을 하지 않았다. 문제는 탁자와 지팡이를 내려 주며 이를 용서했는데 경제가 취임한 이후 조조가 다시 이를 거론하며 오나라의 땅을 땅을 삭감하기를 건의했다. 오왕은 결국 땅을 삭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라 두려워하여 반란을 모의했다. 드디어 오나라의 회계와 예장 두 군을 삭지한다는 한나라의 편지가 이르자 오나라 왕이 먼저 군사를 일으켰고, 그 소식을 듣고 교서와 교동, 치천, 제남, 초, 그리고 조나라 - 총 7국도 모두 반란을 일으켰다. 문제의 유언에 따라 주아부를 태위로 임명했고 주아부의 활약으로 오•초의 반란은 세 달만에 모두 격파됐다.)
한경제 전7년 (BC 150)
3
- 2월 16일, 태위 주아부가 승상이 되고 태위라는 관직은 철폐됐다.
- 제남 태수 질도가 중위가 됐다. 당초 질도는 중랑장이었는데 일찍이 황제를 좇아 상림원으로 들어갔을 때 가희가 뒷간에 갔다. 멧돼지가 갑자기 달려오더니 뒷간으로 들어갔다. 황제가 눈으로 질도를 쳐다보았으나 질도는 움직이지 않았다. 황제는 스스로 무기를 잡고 가희를 구하려고 했다. 질도가 황상 앞에 엎드려 말했다. “한 명의 가희가 없어져 다시 한 명의 가희를 들여 온다 해도 천하에서 적어진 것은 가희일 뿐입니다. 그러나 폐하가 스스로 가벼이 여긴다면 종묘와 태후는 어떻게 하려는 것입니까?” 이 말에 황제가 돌아왔고, 돼지도 가 버렸다. 태후가 이 말을 듣고 질도에게 황금 100근을 하사했다. 이 때부터 질도를 중히 여겼다. 질도는 사람됨이 용감하며 사납고, 공정하며 청렴해 사사로이 서신을 보내는 일이 없었다. 또한 위문하거나 보내오는 물건을 받은 바 없고, 청탁하고 만나자는 것도 들어주는 일이 없었다. 중위가 되자 엄격함과 혹독함을 앞에 내세워 법을 시행했다. 귀척도 피하지 않았다. 열후와 종실의 사람들이 질도를 볼 때면 곁눈으로 살펴보면서 ‘창응(푸른 매)‘으로 부른 이유다.
한경제 중2년 (BC 148)
2
- (태자로 있다 폐위된 임강왕 유영이 중위부에 불려와 조사 받을 때, 유영이 황제에게 사과하는 서신을 쓰고자 했는데 질도가 그러지 못하게 했다. 결국 임강왕이 자살하게 되고 이 소식을 들은 두태후에게 질도는 살해 당했다.)
한경제 중3년 (BC 147)
8
- 당초 황제가 율태자를 폐위시킬 때 주아부는 강하게 말렸으나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했다. 그러나 황제는 이 일로 인해 그를 멀리하게 됐다. 양효왕은 경제 전3년에 주아부와 틈이 벌어진 탓에 황제를 만날 때마다 늘 태후와 더불어 조후 주아부의 단점을 말했다. (…) 9월 30일, 주아부가 면직되고 어사대부 도후 유사가 승상이 됐다.
한경제 중5년 (BC 145)
5
- 9월, 조서를 내렸다. “의문이 남아 있는 사건은 비록 법조문에 맞는다 해도 사람들이 마음으로 따르지 못하는 점이 있다면 이를 다시 평가하고 논의하도록 하라.”
한경제 후원년 (BC 143)
8
- (주아부의 아들이 부친을 위해 장례 치를 준비를 하면 구입하면서 인부들의 돈을 주지 않은 일이 있었는데 이 사건에 주아부까지 연루되어 정위에게 문책 당하게 되었다.) 정위가 문책했다. “군후는 어찌하여 반역을 하려 한 것이오?” 주아부가 반문했다. “신이 사들인 물건은 장사 지낼 때 쓸 물건인데 어찌 반역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오?” 형리가 말했다. “설사 살아서 땅 위에서 반역하려 하지 않았을지라도 죽어서 땅 속에서라도 반역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고는 형리가 그를 다루는 것이 더욱 급해졌다. 처음에 형리가 주아부를 체포할 때 주아부는 자진하려고 했다. 부인이 심하게 말린 까닭에 죽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마침내 정위에게 사건이 인계되자 5일 동안 먹지 않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한경제 후3년 (BC 141)
5
- 1월 27일, 황제가 미앙궁에서 나이 48세로 붕어했다. 태자가 황제에 올랐는데, 이때 나이 16세였다. 황태후 두씨를 ‘태황태후’, 황후 왕씨를 ‘황태후’로 높였다.
8
- 한나라가 일어났을 때에는 진나라의 폐단을 이어받았으므로 할 일이 아주 많고 재물은 궁핍했다. 천자가 타는 수레를 끄는 말조차도 네 마리의 색깔이 같을 수 없었고, 장군이나 승상도 때로는 소가 끄는 수레를 탔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덮을 것도 없었다. (…) 효혜제와 고후 시절에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자 다시 상고에 대한 법률이 해이해졌다. (…) 이어 효문제와 효경제는 깨끗하고 검소하여 천하를 편안하게 돌보아 70여 년간 국가에 큰일이 없었고, 수재와 한재를 만나지 않아 백성들은 집집마다 풍족했다. 도시이건 시골이건 창고는 모두 꽉 차 있었고, 정부의 창고에도 재화가 넘쳤다. (…) 평민들이 사는 크고 작은 골목에도 말들이 있었고, (…) 여염을 지키는 사람도 기름진 고기를 먹었고, (…) 사람들마다 스스로 아끼고 법을 어기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의를 먼저 행하고 굴욕 받을 짓을 멀리했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백성들은 부유했고, 법망이 관대하여, 쓰고 넘친 재물로 교만함을 더해 때로 겸병했고, 토호의 무리들이 향곡을 무단하기에 이르렀다. 종실에도 토지가 있었고, 공•경•대부 이하 모든 사람들이 다투듯 사치했다. 만물은 성하면 쇠퇴한다. 진실로 모든 것은 변한다. 이후로 효무제는 안으로는 지극히 사치하여 돈을 허비하고 밖으로는 이적을 물리치는 전쟁을 일으켜 천하는 쓸쓸해지고 재력도 소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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