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통감 3
사마광 저, 신동준 역, 올재
권 17
한기 9 유학을 관학으로 삼다
한무제 건원 원년 (BC 140)
- (건원은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연호이다.)
한무제 건원 3년 (BC 138)
8
- 황제는 또한 곰이나 돼지를 공격하고, 말을 달려 들짐승 쫓기를 좋아했다. 사마상여가 상소를 올려 간했다. ”(…) 지금 폐하는 험한 요새 땅을 오르고 맹수를 사냥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갑자기 아주 대단한 짐승과 우연히 맞닥뜨리게 되면 깜짝 놀라 안전을 기할 수 있는 땅을 확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 대개 눈 밝은 사람은 싹이 나타나지 않을 때에 이미 먼 곳에서 보고, 지혜로운 사람은 위험이 아직 닥치지 않았을 때 그 위험을 피하는 법입니다. 화란 대부분 미미한 곳에 숨겨져 있다가 사람들이 소홀한 틈을 타 나타납니다. 속담에, ‘집 안에 천만금을 쌓아 놓았다 해도 마루의 귀퉁이에는 앉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비록 작은 말이지만 큰 것에도 비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황제가 이 말을 듣고 칭송했다.
한무제 원광 원년 (BC 134)
2
- (이광이 효기장군이, 정불식이 거기장군이 됐다.) 이광은 행군하면서 대오를 정비하거나 포진하는 일을 하지 않고 물과 풀을 잘 이용해 막사를 치고 쉬게 했으므로 사람들마다 편하게 생각했다. 또한 조두를 치지 않고 스스로 보위했고, 막부에서도 문서를 생략했다. (…) 정불식은 부곡과 행오, 숙영을 올바로 하고, 조두를 치고 군사에 관한 문서를 처리하는 것도 아주 분명했다. 군사들은 휴식을 취할 수가 없었다. 정불식이 말했다. “이광의 군대는 모든 일을 간단하고 쉽게 처리하지만 오랑캐가 갑자기 그들을 침범해 오면 이를 바로 막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의 사졸들은 모두 자신들이 즐기는 것을 버리고 기꺼이 그를 위해 죽는다. 우리 군대는 비록 번거롭고 소란스럽지만 오랑캐가 우리를 침범할 수 없다.” (…) 신 사마광은 평한다. “《주역》에서 말하기를, ‘군대가 나아갈 때에는 마땅히 규율을 지켜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모두 흉하다’라고 했다. 많은 사람을 다스리면서 법을 쓰지 않는다면 흉하지 않을 수 없다. (…) 이광 같은 재주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본받기가 어렵다. (…) 무릇 소인의 성정은 안일한 것을 즐겁게 생각하고, 가까이 닥친 화에 대해서는 어두운 법이다. 저들도 이미 정불식의 방법을 번거롭다 하고 이광의 방법을 기꺼워했다고 한다. 또한 장차는 그 윗사람을 원수로 생각하고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 (…) 정불식을 본닫는다면 비록 공로는 세우지 못할지라도 실패하지는 않을 것이다. 반면 이광을 본받다가는 패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권 18
한기 10 외척끼리 권력을 다투다
한무제 원광 3년 (BC 132)
1
- (…) 황하의 제방이 복양호자(하북성 청풍현)에서 다시금 터져 거야(산동성 거야현)로 물이 쏟아지고 회수와 사수를 지나자 물에 잠긴 군이 열여섯 개나 됐다. 천자가 급암과 정당사에게 병졸 10만 명을 내어 이를 막게 했다. 그러나 제방이 갑자기 다시 무너졌다. (…) 전분이 황제에게 말했다. “장강이나 황하나 제방이 무너지는 것은 모두 하늘의 일인지라 사람의 힘으로 억지로 막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를 막으면 하늘의 뜻에 부응하는 것이 못 됩니다.” 기를 살피고 수를 헤아리는 사람들도 황제에게 그러하다고 말했다. 천자는 오랫동안 다시금 강을 막는 일을 하지 않았다.
한무제 원광 5년 (BC 130)
1
- 봄 정월, 하간왕이 죽었다. 중위 상려가 소식을 전했다. “하간왕은 몸을 단정히 하고 이치에 맞게 행동했습니다. 온화하고 인자했으며 공손하고 절검했습니다. 윗사람은 두텁게 공경했고, 아랫사람은 아껴 주었으며, 많이 알고 깊이 살펴 홀아비와 과부에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 반고가 이같이 찬했다. “옛날 노애공이 말하기를, ‘과인은 깊은 궁중에서 살고 부인들의 손에서 자라나 아직도 걱정거리를 모르고 두려움도 모른다’라고 했다. (…) 비록 위태롭거나 망하지 않기를 바란다 해도 그렇게 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런 까닭에 옛사람들은 안일하게 연회를 여는 것을 독약이라고 생각했고, 덕을 쌓음 없이 부귀하면 불행이라고 말했다. 한나라가 일어나 효평제 때에 이르러 제후왕은 100명을 헤아리게 됐다. 대부분 교만하고 음란해 도를 잃었다. (…) 보통 사람들도 그런 습속에 빠지게 돼 있는데 하물며 애공같이 부귀한 사람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무릇 오직 크게 우아하고 탁월해 보통의 무리들과 함께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하간국의 헌왕이 그와 가까운 사람이다.”
한무제 원삭 원년 (BC 128)
8
- 서락도 서신을 올렸다. “신이 듣건대 ‘천하의 걱정거리는 흙이 무너지는 것 같은 상황에 있지 기와가 깨어지는 것과 같은 상황에 있지 않다’라고 했습니다. (…) 무엇을 ‘흙이 무너진다’라고 합니까? 진나라 말기 상태가 그러했습니다. (…) 무엇을 ‘기와가 깨어진다’라고 합니까? 오/초/제/조나라의 군사 행동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
한무제 원삭 2년 (BC 127)
2
- 주부언이 황제에게 말했다. “옛날 제후들의 봉토는 그 넓이가 100리에 불과해 힘의 형세로 보아 쉽게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제후들은 어떤 사람은 수십 개나 이어진 성을 갖고 있어 그 땅의 넓이가 1000리나 됩니다. 느슨하게 통제를 하면 교만하고 사치하여 쉽게 음란해지고, 급하게 통제를 하면 그 강한 힘을 가지고 통제에 대항하거나 서로 합종하여 경사에 거역합니다. 그렇다고 법을 가지고 그들을 나눠 버리면 반역의 싹이 틀 것입니다. (…) 오늘날 제후들 가운데 어떤 이는 자제가 수십 명이지만 적자만 제후를 이어받고 나머지는 비록 골육이라 할지라도 한 자의 봉토도 없어, 인효의 도리가 선양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컨대 폐하는 제후들에게 은혜를 넓히게 하여 그들의 자제에게도 후작을 나눠 주십시오. 그들의 땅을 나누게 하고 적자가 아닌 아들들을 후로 삼으면, 저들은 모두 바라는 바를 얻어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면 황제는 덕을 베푸는 것이고, 실제로는 그 나라를 나눈 것이니 그들은 점차 약해질 것입니다.” 황제는 이 말을 좇아 봄 정월에 조서를 내렸다.
권 19
한기 11 한무제가 흉노를 치다
한무제 원삭 5년 (BC 124)
3
- (흉노 우현왕이 수차례 침임해 소란스럽게 하자 천자는 거기장군 위청에게 명해 흉노를 치게 했다. 전투 결과 한나라 건국 이래 최대의 전공을 세웠다. 천자는 위청을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다시 식읍으로 8700호를 더해 주었다. 그리고 위청의 세 아들도 모두 열후에 봉하자 위청이 진심으로 사양했다.) “신은 행군 도중에 대죄했으나 다행이 폐하의 신령함에 힘입어 군사가 대첩을 거두었습니다. 이는 모두 여러 교위들이 힘써 싸운 공입니다. 폐하는 이미 신 위청에게 봉작을 더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신 위청의 아들들은 아직 강보(포대기)에 있어 부지런히 수고한 바가 없습니다. 황제가 땅을 내어 주고 세 명을 후로 봉하는 것은 신 위청이 행군하는 가운데 대죄하면서 병사들에게 힘써 싸우라고 권한 뜻은 아닙니다.” 천자가 대답했다. “나는 교위들의 공로도 잊지 않을 것이다.” (…) 이후 위청은 존경과 총애를 받아 군신들 가운데 그만 한 사람이 없었고, 공경하 이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받들었다.
- 대장군 위청은 비록 귀하기는 하나 때로는 황제를 모셨는데 황제는 책상 옆에 앉아서도 가볍게 그를 만나 보았다. 한편 승상 공손홍이 황제를 뵐 때도 황제가 따로 관을 쓰지 않을 때도 있었으나 급암이 와서 알현하려고 하면 황제는 관을 쓰지 않고는 만나지 않았다. 황제가 일찍이 무기를 둔 장막에 앉아 있었을 때 급암이 앞으로 나와 사건을 상주하고자 했다. 황제는 관을 쓰지 않았으므로 급암을 멀리서 바라보고는 장막 안으로 피하며 사람을 시켜 상주한 일은 ‘좋다’라고 전하여 결재했다. 이것으로 황제가 급암을 얼마나 존중하고 예의를 차렸는지를 알 수 있다.
한무제 원수 원년 (BC 122)
7
- 당초 장건이 월지국에서 돌아와 천자에게 서역에 있는 나라들의 풍속을 자세히 고했다. (…) 천자는 이미 대원과 대하, 그리고 안식(이란) 같은 나라들이 모두 큰 나라이면서 기이한 물건이 많고 토착민들이어서 거의 중국과 같은 직업을 갖고 있으나 군사력은 약하고 한나라의 재물을 귀하게 여긴다는 소식을 들은 바 있었다. (… 장건에게 명해 네 곳에서 신독국(인도)을 향하게 했으나 다 막혔다.) 사자가 돌아와 전국이 큰 나라임을 강조하며 귀부시킬 가치가 충분하다고 했다. 천자도 관심을 가지게 되어 이내 서남이로 하여금 한나라를 섬기게 하려고 다시 경락하기 시작했다.
한무제 원수 4년 (BC 119)
4
- (전장군 이광이 흉노를 치러 갈 때 대장군이 직접 선우를 죽이고자 이광을 일부러 동쪽 길로 우회하게 했다. 대장군이 선우를 공격하는 동안 이광은 길을 잃고 헤매다가 선우를 놓치고 돌아오는 대장군을 만났다.) 대장군이 장사를 시켜 이광과 조이기에게 길을 잃은 상황을 나무라면서 그 이유를 묻게 했다. 이어 이광의 막부에 있는 사람들을 신문하게 하자 이광이 대답했다. “교위들에게는 죄가 없다. 내가 길을 잃은 것이니 내가 직접 대장군의 막부로 가 신문에 응하겠다.” 그러고는 휘하 사람들에게 이같이 말했다. “나 이광은 머리를 묶고 성년이 된 뒤 흉노와 크고 작은 전투를 70여 차례 치렀다. 지금 다행히 대장군을 따라 출전해 선우의 군사와 만났다. 대장군은 이 이광의 부대의 임무를 바꿔 먼 곳으로 돌아가게 했고, 거기에다 길까지 잃었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또한 이 이광의 나이가 60여 세인데 지금 와서 붓이나 놀리며 재판이나 하려는 형리들을 만날 수 있겠는가?” 그러고는 칼을 꺼내 자진했다.
- 이광은 사람이 청렴해 상을 받은 것이 있으면 이를 휘하의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먹고 마시는 것도 병사들과 함께 했다. 2000석의 녹질을 받는 벼슬을 40여 년간이나 했지만 집에 남은 재산이라고는 없었다. (…) 병사들을 이끌고 가다가 물이나 음식이 부족하거나 끊기는 지경에 처했을 때 물을 발견할 경우, 사졸들이 모두 마시지 않으면 이광은 물 근처에도 가지 않았고 사졸들이 다 먹지 않으면 먹지도 않았다. 사병들 모두 그가 써 주면 기꺼워한 이유다. 그가 죽자 모든 군사들이 곡을 했다. 백성들도 이 소식을 듣고 그를 알든 모르든 노인이든 장년이든 모두 눈물을 흘렸다.
권 20
한기 12 남월을 정복하다
한무제 원수 5년 (BC 118)
2
- (전해에 급암이 법을 범해 면직됐다.) 황제는 회양(하남성 회양현)이 초 땅의 요충지라고 여겨서, 급암을 불러 회양 태수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급암은 엎드려 사양하면서 인수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누차 억지로 조칙을 내린 뒤에야 조서를 받들었다. 급암이 울면서 황제에게 말했다. “신은 몸이 시궁창이나 산골짜기를 채워 다시는 폐하를 뵙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뜻하지 않게 폐하가 신을 다시 거둬 임용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신은 늘 견마 같은 병에 걸려 힘으로 군 태수의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원컨대 신을 600석의 중랑으로 삼아 주시면 금달(궁궐)에 출입하면서 허물을 보충하고, 소홀한 부분을 챙기겠습니다. 이것이 신의 소원입니다.” 황제가 말했다. “그대는 회양을 얕잡아 보는 것이오. 내가 지금 그대를 부른 것은 회양의 관원과 민간이 서로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고려했기 때문이오. 나는 다만 그대의 중후함을 빌리려는 것이니 침상에 누워서라도 그곳을 다스리도록 하시오.” (…) 이후 급암은 제후국 승상의 2000석 봉록을 받으며 회양에 살다가 그곳에서 10년 만에 죽었다.
한무제 원정 2년 (BC 115)
9
- (…) 이해에 장건이 들어왔다. 도착하자 대행으로 임명됐다. 1년여 지난 뒤 장건이 파견했던 사신들이 대하 등과 통교를 하고 그 나라의 사람들과 함께 왔다. 서역 지방은 비로소 한나라와 통교하게 됐다. 서역에서는 무릇 36개국이 있었다. (…) 동서의 길이가 6000리이고, 남북의 길이가 1000여 리이며, 동쪽은 한나라의 옥문과 양관에 이어져 있고, 서쪽은 총령(신강성 소재) 으로 경계가 돼 있다.
- 한나라에서는 1년 중에 사신을 보내는 것이 많은 경우에는 10여 차례, 적은 경우에도 대여섯 차례였다. 먼 곳까지 다녀오는 데는 팔구 년, 가까운 곳도 몇 년은 걸렸다.
한무제 원정 4년 (BC 113)
6
- (…) 당시 하급 관원들은 업무를 처리할 때 모두 참혹하고 각박하게 하는 것을 숭상했지만 좌내사 예관만은 농업을 권장하고 형벌을 느슨하게 하며 옥송을 이치대로 처리하고 인심을 얻는 데 힘썼다. 또한 어질고 후덕한 인사를 골라서 채용했고, 아랫사람들에게 인정을 베풀며 명성을 구하지 않자 하급 관원과 백성들이 그를 크게 믿고 따랐다. 조세를 거둘 때에도 재량대로 완급을 조절했고, 민간인들에게 빌려주기도 했다. 조세가 많이 들어오지 않았다. 뒤에 가서 전쟁이 발생하자 좌내사는 조세를 제대로 거두지 못했으므로 고과 성적이 제일 밑바닥이었고, 마땅히 면직되어야 했다. 당연히 그가 면직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백성들이 모두 그르 잃어버릴까 걱정하여 부잣집에서는 소와 수레로, 가난한 집에서는 등짐으로 조세를 날라 왔다. 그 모습이 새끼줄이 이어지는 것처럼 끊이지 않아 고과 성적이 제일 높아졌다. 황제는 이로 말미암아 예관을 기이하게 생각했다.
한무제 원봉 원년(BC 110)
1
- “남월과 동구는 모두 그들의 죄를 받았다. 그러나 서만과 북이는 아직도 무리와 화목하지 못하고 있다. 짐은 장차 변경을 순시할 것이고, 몸소 병부를 장악하고 12부의 장군을 두어 친히 군사를 통솔하겠다.” (… 황하의 북쪽 상류인 북하에까지 이르러) 곽길을 사자로 파견해 선우에게 고하게 했다. “남월왕의 머리는 이미 한나라의 북쪽 궁궐에 매달아 놓았다. 지금 선우가 싸울 수 있다면 천자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변경에서 기다리겠다. 싸우지 못하겠거든 당장 남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신하로서 복종하라. 왜 막북으로 숨어들어가 추위와 고생을 자청하고, 물도 풀도 없는 땅에 사는가? 그리할 것 없다.” 사자가 말을 마치자 몸시 화가 난 선우는 그 자리에서 자신에게 사자를 알현시킨 자들을 목 베고 곽길을 억류해 북해(바이칼)에다 옮겨 두었다. 그러나 두려워 끝내 감히 싸우러 나오지 못했다.
4
- 4월 16일, 태산 아래 기슭의 동북쪽에 있는 숙연산에서 후토신에게 제사 드리는 예식처럼 제사를 드렸다. 천자가 친히 절했고, 황색 옷을 입고 음악을 사용했다. (역자 주. 한나라는 이전까지 적색을 숭상했다가 이 때를 계기로 황색을 숭상하게 됐다. 이는 오행설에 따른 것으로 한나라의 덕을 화덕이 아닌 토덕으로 간주한 데 따른 것이다.)
권 21
한기 13 대원의 한마를 얻다
한무제 원봉 3년 (BC 108)
3
- 처음으로 각저희(씨름), 어룡(마술의 일종), 만연(큰 짐승 놀이) 같은 것들이 만들어졌다.
한무제 태초 원년 (BC 104)
4
- 여름 5월, 공손경과 호수, 사마천 등에게 조서를 내려 함께 한나라의 태초력을 만들게 했다. 정월을 한 해의 첫 달로 하고(그 전은 10월이 시작) 색은 남방색인 홍색을 중시한 한고제 때와 달리 황색을 존중했다. 인장의 글자 수는 다섯 글자를 쓰도록 했다. 또한 관직명을 확정하고 음률을 조율하고, 종묘와 백관의 여러 의식으로 정해 전범으로 만들어 이를 후세에 전해 주게 했다.
한무제 태초 3년 (BC 102)
6
- (태초 2년에 이사장군이 대원국을 정벌하러 갔다가 실패하고 처음 군사의 10분의 1~2 정도만 남아서 돈황에 머물러 있으면서 황제에게 일단 철수 후 다시 가겠다고 서신을 보냈다. 황제는 크게 화가나 돌아오는 병사가 있다면 목을 베라고 했다.) 착야후의 병사를 다 잃게 되자 공경들이 모여 의논한 결과 대원국을 치는 군사를 철수하여 오로지 흉노만 공격하고자 했다. 그러나 천자는 이미 군사를 출동시켜 대원국을 주륙하려 했다가 대원국같이 작은 나라도 함락시키지 못했으니 대하국의 무리들이 점차 한나라를 가볍게 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원국에 있는 좋은 말을 가져오지 못하는 것도 아쉬웠다. 게다가 오손국(신강성 이령시)과 윤대국(신강성 윤대현)도 쉽게 한나라의 사절들을 고생시킬 터이니 외국의 웃음거리만 될 뿐이라고 생각했다. 대원국을 정벌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말한 등광 등을 처벌했다. (이후 대규모의 군대를 보내 대원국을 정벌하고 말을 얻었다.)
한무제 태초 4년 (BC 101)
4
- 흉노의 구리호선우가 죽자 흉노는 그의 동생좌대도 차제후를 9대 선우로 내세웠다. 천자는 대원을 정벌한 위엄을 가지고 흉노를 곤란하게 하려고 조서를 내려 말했다. “고황제는 짐에게 흉노에게 포위되는 ‘평성(산서성 대동현)의 근심’을 남겨 주었고, 고후 때에는 선우가 서신을 보내는 패역을 저질렀다. 옛날 제양공은 9대조의 원수를 갚았는데 《춘추》에서는 이런 일을 크게 취급했다.” 난제(차제후) 선우는 막 즉위한 까닭에 한나라가 그들을 습격할까 두려운 나머지 이같이 대답했다. “나는 어린아이인데 어찌 감히 한나라 천자를 쳐다나 볼 수 있겠습니까? 한나라 천자는 나의 어른입니다.” 한나라 사자 가운데 흉노에 붙들려 있다가 그들에게 굽히지 않은 노충국 등을 모두 돌려보내고, 사자를 통해 예물을 바쳤다.
권 22
한기 14 무고의 화가 빚어지다
한무제 태시 원년 (BC 96)
4
- 이해에 흉노인 제9대 선우 차제후가 죽었다. 그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다. 장자인 고록고는 좌현왕, 둘째 아들은 좌대장으로 있었다. 좌현왕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때 귀인들은 그에게 병이 있다고 여기고 좌대장을 선우로 세웠다. 이 소식을 들은 좌현왕은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좌대장이 좌현왕을 불러 선우의 자리를 양보했다. 이 때 좌현왕이 병을 핑계하며 사양했으나 좌대장은 그 말을 듣지 않고 말했다. “불행이도 그대가 죽는다면 그때 가서 나에게 전해 주십시오.” 이때 비로소 좌현왕이 즉위를 허락하고, 마침내 고록고선우가 됐다. 이어 좌대장을 좌현왕으로 삼았다.
한무제 태시 3년 (BC 94)
2
- (이해에 황제의 아들 유불릉이 구과궁에서 출생했는데 조첩여가 임신한지 14개월 만이다. 그래서 황제는 그가 태어난 문을 ‘요모문’으로 명명했다.) 신 사마광은 평한다. “군주가 된 사람은 움직이는 것과 가만히 있는 것, 드는 것과 조치는 취하는 것에 모두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음속에서 싹이 터서 밖으로 형체가 드러나면 천하에는 이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당시 황후와 태자에게는 아무런 걱정거리도 없었다. 이런 때 구과궁의 문을 요모문이라고 명명한 것은 명분에 맞지 않았다. 이리되면 간사한 자들이 황제의 뜻을 탐지해 그 어린 아들을 특별히 아낀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후계자로 삼고자 한다. 황후와 태자를 위해할 마음이 생겨 결국 ‘무고지화’를 만들어 냈다. 슬픈 일이다.”
한무제 정화 원년 (BC 92)
4
- (황제가 건장궁에 있을 때 한 남자가 칼을 차고 중룡화문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 잡아들이라 하자, 그 자가 도주했는데 결국 잡지 못했다.) 이때부터 무고가 시작됐다.
5
- (이 남자로 인해 대협 주안세를 잡아야 했고, 잡힌 주안세가 승상 공손하의 아들인 공손경성이 양석공주와 사사로이 정을 통했고, 황제가 감천궁에 갈 때 무술사에게 치도에 인형을 만들어 묻게 하고 황제를 저주하고, 악담을 했다고 고했다.)
한무제 정화 2년 (BC 91)
1
- (공손하 부자와 전 가족이 죽임을 당했다.)
3
- 윤4월, 제읍의 공주와 양석공주, 위청의 아들로 황후의 조카인 장평후 위항이 모두 무고에 연루돼 죽었다. (역자주 : 무제는 이 일로 인해 중국 역사상 최초로 친딸을 죽인 황제가 됐다.)
5
- 당시 방사와 여러 신무들이 경사에 많이 모였다. 대부분 사도로써 사람들을 현혹했고, 변화무쌍한 환영을 가지고 못하는 일이 없었다. 여자 무사들이 궁중을 왕래했고, 비빈들은 액을 헤아려 방마다 나무로 만든 인형을 묻어두고 제사를 지냈다. 투기하고 욕지거리를 했으며, 황제를 저주하고 대역부도를 꾀한다고 서로 고발했다. 황제가 대로해 죽인 후궁과 이런 일에 연루된 대신들이 수백명이나 됐다. 그러나 황제의 마음속에는 이미 의심의 병이 생겨 있었다.
- (강충은 황제가 죽은 뒤 태자가 자신을 죽일까 두려워 황제의 병이 무고로 인한 것이라고 꾸몄다. 황제는 강충을 사자로 하여 무고의 옥사를 처리하게 했는데, 여기에 연루돼 죽은 사람이 앞뒤로 수만 명이다. 강충은 더 나아가 황후와 태자궁까지 종횡으로 땅을 파 고를 찾았다. 태자는 전모를 황제에게 고하고 강충을 처리하고자 했으나 강충에 막히자 군사를 일으켰다. 강충은 이를 반란이라고 황제에게 고해 황제는 태자를 죽이라고 명해서 황제군사와 태자군사가 싸우게 되고 결국 태자군사가 패해 태자가 도망다니게 됐다. 영호무의 상소로 황제는 사건의 진상에 대해 느끼고 깨달았지만 아직도 감히 태자를 사해 주겠다는 말을 하지는 못했다. 결국 태자는 관원들에 포위되어 자진했다. 황후도 그 전에 자진했다.)
- 신 사마광은 평한다. “옛날 밝은 군주가 태자를 가르치고 기를 때에는 그를 위해 방정하고 돈독하고 훌륭한 선비를 가려 뽑아 보부나 사우로 삼아 아침저녁으로 더불어 노닐게 했다. 전후좌우에 바르지 않은 사람이 없게 하고, 출입하고 기거하는 데에도 바른 도가 아닌 게 없게 했다. 그렇게 하여도 음란하고 방탕하며 나쁜 것에 치우쳐 실패하는 사람이 있었다. 지금 태자에게 스스로 빈객들과 왕래를 하도록 하고, 그가 좋아하는 것을 좇도록 했다. 무릇 정직한 사람은 친하기 어렵고, 아부하는 사람은 쉽게 합쳐질 수 있는 법이다. 이는 진실로 보통 사람들의 보통의 정리이다. 태자가 좋은 끝을 볼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무제 정화 3년 (BC 90)
7
- 관원과 백성들이 무고를 서로 밀고했다. 사건들을 조사해 보니 대부분 사실이 아니었다. 황제는 태자가 다른 뜻이 없었다는 것을 이미 알았다. 마침 한고제 유방의 사당인 고묘의 담당 관원인 침랑 전천추가 급히 상주문을 올려 태자의 억울함을 고했다. (… 황제가 이를 듣고) “부자 사이를 다른 사람이 말하기는 어려운 법인데 공만이 홀로 그렇지 않음을 밝혔소. (…)” 이후 강충 집안의 가족을 모조리 죽이고 소문을 횡교에서 불태워 죽였다. 천구리에서 처음 태자에게 창칼을 댄 사람도 그의 가족까지 다 죽였다. 태자가 무고했음을 가련하게 생각한 황제는 이내 사자궁을 짖고 호현에 귀래망사지대(태자의 혼령이 돌아오기를 바라고 생각하는 누대)를 만들었다. 천하 사람이 이를 듣고 슬퍼했다.
한무제 정화 4년 (BC 89)
3
- 전천추가 말했다. “방사들 가운데 신선에 관해 말하는 이들은 아주 많으나 실제로 드러난 공적이 없으니 청컨대 그들을 모두 파면시켜 내보내십시오.” 황제가 대답했다. “대홍려의 말이 옳다.” 신인을 기다리는 병사들을 모두 파면해 내쫓았다. 황제는 이후 군신들을 대할 때마다 스스로 탄식했다. “지난 날 내가 어리석어 방사들에게 속았다. 천하에 어찌 선인이 있겠는가? 모두 요망한 일일 뿐이다. 밥을 덜 먹고 약을 먹으면 질병을 좀 적게 할 수 있을 뿐이다.”
4
- 대홍려 전전추가 승상이 돼 부민후에 봉해졌다. 전전추는 별다른 재능도 없었고, 내새울 만한 경력이나 공로도 없었다. 다만 한마디 말로 황제의 뜻을 깨우쳐 주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몇 달 만에 재상이 되고 후로 봉해졌다. 이전 시대에는 없던 일이다. 그러나 그는 사람됨이 돈후하고 지혜가 있어 그 자리에 걸맞게 행동해 그를 전후해 있었던 몇몇 재상보다 뛰어났다.
한무제 후원 원년 (BC 88)
7
- (황제는 유단, 유서 등 차례로 보아 태자가 되어야 할 아들들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고, 나이가 몇 살밖에 되지 않는 유불릉을 태자로 삼고 싶어 했다. 유불릉의 모친은 구과부인인데 젊었다. 황제는 곽광에게 유불릉을 태자로 세울 수 있도록 지시했다.) 며칠 뒤 황제는 구과부인을 견책했다. 구과부인이 비녀와 귀걸이를 풀고서 머리를 조아렸으나 황제가 말했다. “끌어내어 죄 지은 궁인을 심문하는 액정의 감옥으로 보내라.” 구과부인이 머리를 돌려 쳐다보자 황제가 말했다. “빨리 가도록 하라, 너는 살 수가 없다.” 끝내 구과부인에게 죽음이 내려졌다. 얼마 후 황제가 한가하게 있으면서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이 사건을 보고 밖에 있는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던가?”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대답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의 아들은 태자로 세우면서 어찌하여 그의 모친은 제거하는가?‘라고 했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그럴 것이다. 이는 어린애같이 어리석은 자들이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과거 국가가 어지럽게 된 까닭은 군주가 어리고 모친이 장년이었기 때문이다. 여자 주군이 교만하고 옹색하며 음란하여 멋대로 한다면 이를 금할 수가 없다. 너희들은 여후의 사건을 못 들었는가? 그런 까닭에 어쩔 수 없이 어미를 먼저 제거한 것이다.”
한무제 후원 2년 (BC 87)
2
- 2월 12일, 유불릉을 황태자로 삼는다는 조서를 내렸다. 그 때 유불릉의 나이는 겨우 8세였다.
- 2월 13일, 곽광을 대사마 겸 대장군, 금일제를 거기장군, 태복 상관걸을 좌장군으로 삼아 어린 군주를 보필하라는 유조를 내렸다. (…) 이들은 모두 황제가 누워 있는 침상 밑에서 유언으로 남긴 조서를 받았다.
- 2월 14일, 황제가 71세의 나이로 오작궁에서 붕어했다. 황제는 총명했고 결단을 내릴 줄 알았으며, 사람 쓰는 일을 잘했다. 그러나 법을 시행하는 데에는 인정을 베풀지 않았다.
- 신 사마광은 평한다. “효무제는 아주 사치하고 지극한 욕심을 갖고 있어 번거로운 형벌을 사용했고 세렴을 무겁게 거두었다. 안으로는 궁실을 사치스럽게 꾸미고, 밖으로는 사방의 이적들을 정벌했으며, 신의 괴이함을 믿고 현혹돼 절도 없이 순유를 했다. 백성들을 피폐하게 하여 도적이 일어났으니 그런 것은 진시황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진나라가 이런 일 때문에 망하고 한나라는 이런 일 때문에 흥했다. 효무제는 먼저 선왕의 도를 존중했고, 통제하고 지킬 바를 알았다. 충직한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이 속이고 감추는 것을 싫어했다. 이는 현명한 사람을 좋아하는 데 게으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죽이거나 상 주는 것을 엄정히 밝혔고, 만년에는 잘못을 고쳐 후사를 돌봐줄 사람을 찾아냈다. 이것이 바로 그가 망한 진나라와 같은 실수는 저질렀으나 망한 진나라와 같은 화는 면할 수 있었던 이유다.”
- 2월 15일, 태자가 황제로 즉위했다. 곽광과 금일제와 상관걸이 함께 상서의 일을 관장했다. 곽광이 어린 군주를 보필했으므로 자연히 정치는 그로부터 비롯됐다.
권 23
한기 15 곽광이 권력을 휘두르다
한소제 시원 원년 (BC 86)
5
- 9월 병자, 시호가 경인 투경후 금일제가 죽었다.
한소제 원봉 원년 (BC 80)
5
- (상관걸과 상관안 부자는 존귀해지자 개장공주에게 크게 감격했고 개장공주의 정부인 정외인을 제후에 봉할 것을 요구했으나 곽광이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상관걸의 장인이 아끼는 총국이 사형 판결을 받았으나 개장공주의 도움으로 감형된 일도 있었다.) 상관걸 부자는 곽광이 조정의 일을 멋대로 처리하는 모습을 돌아보고는 이내 곽광과 권력 투쟁을 벌이게 됐다. (싱관걸이 유단을 통해 황제에게 곽광이 낭관 검열시 황제와 같은 대접을 받도록 했다는 모함을 하게 했다.) (…) 다음 날 아침 곽광이 이 소식을 듣고 대신들이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기다리는 화실에 머물면서 들어가지 않았다. 황제가 물었다. “대장군은 어디에 있는 것이오?” 좌장군 상관걸이 대답했다. “연왕이 그의 죄를 고했습니다. 그가 감히 들어오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황제가 조서를 내렸다. “대장군을 부르시오.” 곽광이 들어와서 관을 벗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황제인 소제가 말했다. “장군은 관을 쓰시오! 짐은 이 서신이 거짓인 것을 알고 있소. 장군은 죄가 없소.” 곽광이 물었다. “폐하는 이를 어찌 안 것입니까?” 황제가 대답했다. “장군이 동문 밖의 광명으로 나가 금위군인 낭관을 검열한 것은 최근의 일일 뿐이고, 교위를 선발한 지 아직 10일이 지나지 않았소. 연왕이 어떻게 이를 알았겠소? 또 장군이 비행을 저지르고자 했다면 교위를 기다릴 필요도 없을 것이오.” 당시 소제의 나이 14세였다.
- 뒤에 상관걸의 무리가 곽광 등에 대해 거짓으로 꾸며서 헐뜯는 말을 했다. 황제가 문득 화를 냈다. “대장군은 충신이오. 선제가 짐을 보살피라고 위촉한 이유요. 감히 할뜯는 자가 있으면 연루시키도록 하겠오!” 이후 상관걸 등은 감히 다시 말을 하지 못했다.
- 당나라 때의 유학자 이덕유가 논했다. “인군의 덕은 지극히 밝은 것보다 더한 게 없다. 밝혀 간사한 것을 비추면 온갖 사악한 것이 스스로 감출 길이 없게 된다. 한소제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주성왕은 한소제에 비해 덕행 면에서 부끄러운 점이 있다. 한고제와 한문제, 한경제 모두 한소제만 못했다. (…)“
6
- (상관걸이 유단과 모의하여 곽광을 죽이고 황제를 폐위한 후 연왕 유단을 천자로 세우기로 모의했다. 또 상관안은 유단마저 죽이고 부친인 상관걸을 새 왕조의 황제로 옹립하고자 했다. 결국 발각되어 상관걸 종족 모두 죽고 개장공주는 자살하고 유단도 자살했다.)
권 24
한기 16 창읍왕이 좇겨나다
한소제 원평 원년 (BC 74)
2
- 여름 4월 17일, 한소제 유불릉이 23세의 나이로 미양궁에서 붕어했다. 후사가 없었다. 당시 한무제의 아들로는 오직 광릉왕 유서가 있을 뿐이었다. (광릉왕은 황실의 체통을 잃게 하는 행동을 해서 선제인 한무제도 쓰지 않았고 그래서 곽광도 내심 불편해 했다. 결국 황후의 조서를 받아 창읍왕 유하를 맞이하게 했다. 유하는 한무제의 다섯째 아들인 창읍애왕 유박의 아들인데 평소 미친듯이 방종하고 행동에 절도가 없었다.)
- (이런 창읍왕에게 중위인 낭야 출신 왕길이 상소했다.) ”(…) 위로 요순시절을 논하기 시작해 아래로 은나라와 주나라의 성대한 시기까지 이르고, 어질고 성스러운 기풍을 상고하며, 나라를 잘 다스리는 도리를 익히고, 기쁜 마음으로 분을 내어먹는 것도 잊으며, 그날로 덕을 새롭게 하면 그 즐거움이 어찌 말 위에 올라타 내달리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쉴 때는 고개를 숙였다가 올려다보고 굽혔다 펴는 것으로 몸을 이롭게 하고, 나아가고 물러가면서 걸음을 재빠르게 하여 아래를 튼튼히 하며, 새로운 공기를 마시고 묵은 공기를 뱉어 내장을 단련하고, 뜻을 오로지하여 정수의 기운을 쌓음으로써 정신을 저화롭게 하는 식으로 양생합니다. 이같이 하면 어찌 장수하지 못할 리 있겠습니까? 대왕이 진실로 이런 것에 마음을 두면 마음은 요순의 뜻을 지니게 되고, 몸은 전설상의 신선인 백교와 적송자의 수명을 누리며, 아름다운 명성과 드넓은 칭송이 마침내 조정에까지 알려져 복록이 모여들고, 사직은 안정을 누릴 것입니다. (…)”
- 6월 1일, 창읍왕이 황제의 인새와 인수를 받고 존호를 이어 받았다. 황후를 높여 황태후라고 했다.
4
- 창읍왕은 보위에 오른 뒤에도 음탕한 놀이를 그치지 않았다. (결국 곽광 등이 황태후에게 간하여 창읍왕을 폐위시켜 창읍으로 돌려보냈다.)
5
- (창읍왕 폐위 후 곽광은 황제 옹립 문제를 여러 대신들과 논의했으나 쉽게 결론을 내지 못했는데, 효무황제의 증손 유병의를 추천받아 그를 황태후에게 천거했고 황태후가 좋다는 조서를 내렸다.)
- 7월 25일, 유병이가 황제(선제)의 자리에 올랐다.황태후를 태황태후로 높였다.
한선제 본시 원년 (BC 73)
2
- 대장군 곽광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정을 군주에게 돌려주는 귀청을 이야기했다. 황제가 겸양하며 받지 않고, 모든 일은 먼저 곽광에게 보고하는 관백을 한 뒤 자신에게 보고토록 했다. (…) 형제와 여러 사위, 외손자들 모두 여러 중앙 관서의 실무 관직을 맡았다. 그 무리와 친척이 한 몸처럼 연결돼 조정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창읍왕이 폐위되자 곽광의 권력은 더 무거워졌다. 그가 알현할 때면 황상인 한선제는 스스로를 비우며 용모를 단정히 하는 허기염용의 모습을 보였다. 스스로를 낮추는 자세가 이미 심했다.
한선제 지절 2년 (BC 68)
1
- 3월 8일, 곽광이 죽었다. 황제와 황태후가 곽광의 상례에 친림했다. (…) 재궁(관곽)과 장례 도구는 모두 황제가 사용하는 승여제도를 좇도록 하고, 시호를 선성후로 정했다. (…) 조서를 내려 곽광의 후손들에게 부세를 면제하게 하고 곽광의 작읍을 세습함으로써 세세토록 부세를 감당하는 일이 없도록 조치했다.
4
- 한선제는 여염의 가정에서 일어나 민사의 간난을 깊이 이해했다. 곽광이 이미 죽자 비로소 친정을 시작했다. (…) 한선제는 내심 태수는 이민의 근본인 까닭에 자주 바뀌면 밑의 사람들이 불안해할 것으로 판단했다. 이어 백성들은 태수가 오래 있을 것을 알면 속일 수 없고, 마침내 그의 교화에 복종하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 공경 가운데 결원이 생기면 표창을 받은 이천석 지방 장관 가운데 차례로 발탁해 임용했다. 한나라의 양리(뛰어난 관원)는 바로 여기서 번성했고, 세상 사람들 또한 한나라의 중흥이 이때 이루어졌다고 칭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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