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통감 4
사마광 저, 신동준 역, 올재
권 25
한기 17 곽씨 일족을 제거하다
한선제 지절 4년 (BC 66)
5
- 반고가 《한서》에서 이같이 찬했다. “곽광은 한무제로부터 강보에 싸여 있는 후사에 대한 부탁과 한나라 황실의 앞날에 대한 기탁을 받아 나라를 바르게 하고 사직을 안정시키며, 한소제를 옹립하고, 다시 한선제를 세웠다. 비록 주나라의 주공과 은나라의 이윤일지라도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는 배우지도 못하고, 술책도 없어 천하를 다스리는 이치에 어두웠다. 은밀히 부인이 사악한 음모를 꾸며 딸을 황후로 삼고, 가득차고 넘치는 욕심에 빠진 나머지 전복되는 화란을 더욱 깊게 함으로써 죽은 지 3년 만에 종족이 모두 토벌되고 말았다. 아, 슬픈 일이다!” 신 사마광은 평한다. “곽광이 한실을 보필한 것을 보면 충성스러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끝내 그 종족을 비호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무릇 위복은 인군의 그릇이다. 인신이 이를 잡고 오래 있으면서 돌려주지 않으면 화가 미치지 않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한소제는 명찰 덕분에 14세였는데도 상관걸의 속임수를 알아챘다. 진실로 친정을 할 수 있었던 이유다. 하물며 한선제는 19세에 즉위한 데다 총명하고 의지가 굳세었다. 더구나 백성이 질고를 모두 알았고, 곽광은 오랫동안 대병(통치)을 오로지한 까닭에 피해 갈 줄을 몰랐다. 친당을 많이 만들어 조정을 꽉 채운 게 그렇다. 이는 인주에게는 분노를 쌓게 만들고, 이민에게는 원망을 쌓게 하여 마침내 이를 갈고 눈을 흘기는 자세로 때가 오길 기다리다가 화를 폭발시키는 빌미를 제공했다. 당사자는 화를 면한 게 다행이겠으나 하물며 그 자손이 교만과 사치로 치달은 경우이겠는가! (…)”
한선제 원강 원년 (BC 65)
8
- (우말망본 : 지엽을 걱정하다 근본을 잊는 것을 말한다)
한선제 원강 2년 (BC 64)
4
- 한선제가 또 말했다. “듣건대 옛날 천자의 이름은 민간인이 상용하지 않은 까닭에 쉽게 피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짐은 오늘부로 이름을 유순으로 고치도록 하겠다.” (역자주 : 일반 백성은 황제의 이름에 쓰인 글자와 같은 글자를 쓸 수 없었다. 한선제의 원래 이름은 유병이인데 ‘병’과 ‘이’ 모두 널리 쓰이는 글자인 까닭에 많은 불편을 초래할 것을 우려해, 잘 쓰지 않는 ‘순’으로 개명한 것이다.)
5
- (흉노에 포위된 한나라 군사를 구하자는 의견에 대해) 위상이 상서해 간했다. “신은 듣건대. ‘어지러움을 구하고 흉포한 것을 주벌하는 것을 의병이라 하고, 병사가 의로우면 왕자가 된다. 적이 나에게 다가오면 부득이 기병하는 것을 응병이라 하고, 병사가 부득이하여 일어나면 승자가 된다. 원한을 품고 작은 이유를 대고 다투다가 분을 참지 못하는 것을 분병이라 하고, 병사가 분을 참지 못해 일어나면 패자가 된다. 다른 사람의 토지와 화보(아주 귀하고 가치 있는 물건)를 이롭다고 여기는 것을 탐병이라 하고, 병사가 탐심을 가지면 적에게 이내 격파되고 만다. 나라가 큰 것만 믿고 민인이 많은 것만 자랑하며 적에게 위엄을 보이려는 것을 교병이라 하고, 병사가 교만하면 적에게 이내 멸망하게 된다. 이들 다섯 가지 이치는 비단 인사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바로 천도이기도 하다’라고 했습니다. (…)” 한선제가 위상의 말을 좇아 파병하려는 생각을 그쳤다.
한선제 원강 3년 (BC 63)
2
- “짐이 미천한 신분이었을 때 어사대부 병길을 비롯해 (…) 모두 짐에게 은혜를 베푼 바 있다. (…) 《시경》<대아•억>에는 ‘보답하지 않을 덕은 없다’라고 했다. (…)” (그리고 모두 작위를 내렸다.)
- 어떤 낭관이 공로가 큰데도 승진하지 못하자 이를 장안세에게 말했다. 장안세가 이같이 응답했다. “그대의 공이 높다는 것은 밝으신 황제께서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신하가 일을 하면서 어찌하여 그 장단을 스스로 말하는 것이오!.” 그러고는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얼마 후 그는 한선제의 배려로 과연 승진했다.
3
- 태부 소광이 형의 아들인 소부 소수에게 말했다. “내가 듣건대, ‘만족할 줄 알면 욕될 일이 없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로워지지 않는다’라고 했소. 이제 벼슬살이를 하여 이천석에 이르렀고, 관직도 높아지면서 명성도 이뤘소. 이와 같은데도 물러나지 않으면 후회할 일이 있을까 걱정이오.” 그날로 숙질이 함께 병을 핑계로 상소하여 사직을 청했다. 황제가 이를 모두 허락하고, 황금 20근을 덧붙여 하사했다. (…) 사람들이 모두 말했다. “현명하구나, 두 대부여!”
- 소광과 소수는 향리로 돌아온 뒤 매일 집안사람들을 시켜 금을 팔아 음식을 장만하게 한 뒤 친족과 옛날 친구 및 빈객을 초빙해 함께즐겼다. 어떤 사람이 소광에게 자손을 위해 산업을 일으키는 데 황금을 사용할 것을 권하자 이 같이 대답했다. “내가 어찌 늙어서 어지럽다고 한들 자손을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우리 집은 본래 예전부터 있던 전답과 여막이 있어 자손들이 근면히 경작한다면 충분히 의식을 제공받을 수 있어 보통 사람들과 비슷한 생활을 할 수 있소. 지금 다시 이를 늘여 남아도는 것이 있게 한다면 단지 자손을 나태하고 타락하게 만들 뿐이오. 현명한데 재물이 많으면 그들의 뜻을 손상하게 되고, 우매한데 재물이 많으면 그들의 허물을 더하게 할 것이오. 무릇 부는 많은 사람의 원망의 대상이 되는 법이오. 나는 이미 자손을 잘 교화시키지 못한 상황에서 그 허물을 더욱 늘여 원망까지 생기게 만들고 싶지는 않소. 이 황금은 성주가 이 늙은 신하가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하사한 것이오. 향당 및 종족들과 그 하사한 것을 함께 누리면서 나의 여생을 보내고자 하오. 이 또한 좋지 않겠소!” 친족들이 기뻐하며 감복했다.
4
- 허현의 현승은 늙고 병든 데다 귀머거리였다. 시찰관인 독우가 위에 보고해 쫓아내고자 했는데, 황패가 말했다. “허현의 현승은 청렴하고 바른 관리로서 비록 늙기는 했으나 여전히 진퇴와 응접 등의 일을 행할 수 있소. 아무리 귀머거리라고 한들 무슨 손해될 게 있겠소! 그를 잘 도와주어 현명한 그 사람이 실망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묻자 황패가 대답했다. “자주 장리를 바꾸면 옛사람을 보내고 새로운 사람을 맞이하는 비용이 들게 되오. 또 간리가 인연을 맺게 돼 장부를 중간에서 끊어 버리거나, 재물을 도적질하게 돼 공사 간에 소모되는 비용이 많아지오. 이 모든 것은 백성에게서 나오는 것이오. 나아가 바뀐 새 관원 또한 반드시 현명한 것은 아닐 터이니 혹여 옛날 사람만 못할 경우 헛되이 혼란만 가중시키는 게 되오. 무릇 치도의 요체는 아주 심한 사람만 제거하는 데 있을 뿐이오.” 황패는 겉으로는 관대하면서도 속으로 상대의 속셈을 분명히 아는 인물이었다. 그런 까닭에 이민의 마음을 얻었다.
권 26
한기 18 흉노 정책이 성공하다
한선제 신작 원년 (BC 61)
1
- 당초 한선제는 왕포에게 뛰어난 재주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내 불러다 본 뒤 <성주득현신송>을 짓게 했다. 가사에 이런 내용이 있다. “무릇 현자는 국가에서 사용하는 도구이다. 임현을 하면 나라의 거동인 추사를 줄이고, 널리 퍼지는 양호한 공효를 거둘 수 있다. 사용하는 도구가 날카로우면 쓰는 힘이 적어도 공효는 클 것이다. 공인이 무딘 도구를 쓰면 근골을 수고롭게 하여 하루 내내 피곤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 성근 옷을 입어 시원한 사람은 여름의 답답한 더위에도 고생하지 않고, 담비가죽과 여우털로 만든 옷을 입어 따뜻한 사람은 처량할 정도로 추운 추위에도 걱정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도구를 가진 사람은 미리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인과 군자 역시 성왕이 해내를 쉽게 다스리는 도구이다. 옛날 주공은 몸소 토착지로(주공이 밥을 먹다가 손님이 오면 먹던 밥을 세 번 뱉고, 감던 머리를 감다가 중단한 채 세 번 묶고 급히 뛰쳐나간 고사를 가리킨다.)를 보인 덕분에 감옥이 텅 비는 융성을 보게 됐다. 제환공은 밤낮없이 인재를 맞아들이기 위해 뜰에 불을 밝혀 두는 예를 행한 덕분에 단 한 번에 천하를 바로잡으면서 아홉 번에 걸쳐 천하의 제후들을 규합하는 공을 세웠다. 이로써 보건대 군주는 현자를 구하는 일에 부지런해야만 비로소 인재를 얻어 편안할 수 있다. 신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옛날 현자는 아직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를 만나지 못했을 때는 일과 계책을 도모할지라도 군주는 그것을 사용하지 않고, 간절한 마음을 진술해 드러내어도 군주는 그것을 신용하지 않았다. 또 벼슬을 할지라도 그 효과를 볼 수 없고, 내쳐짐을 당해도 그것을 허물로 여기지 않았다.
권 27
한기 19 왕도와 패도를 병용하다
한선제 오봉 원년 (BC 57)
3
- 당시 한나라 조정에서 (흉노에 대해) 의논하던 자들이 대부분 이같이 말했다. “흉노가 한나라에 해악이 된 지 오래이다. 그들의 어지러운 틈을 타 군사를 일으키면 멸망시킬 수 있다.” 한선제가 조서를 내려 어사대부 소망지에게 물었다. 소망지가 대답했다. “<<춘추>>에 따르면, 진나라 대부 사개는 군사를 이끌고 제나라를 침략하다가 제나라 군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내 군사를 이끌고 철수했습니다. 군자는 상중에 있는 적국을 정벌하지 않는 것을 칭송했습니다. 은이 효자를 감복시키기에 족하고, 의가 제후를 감동시키기에 족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 불행히 중국을 흠모하는 선우가 적신에게 피살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저들을 정벌하면 혼란한 틈을 타고 저들의 재앙을 다행으로 여기는 게 됩니다. 저들은 반드시 바삐 달아나 멀리 가서 숨을 것입니다. 의로써 군사를 움직이지 않으면 수고롭기만 하고 공을 세우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마땅히 사자를 보내 조문하고, 저들의 미약한 것을 도와주며, 그 재환을 구해 주어야 합니다. 사이가 이 소식을 들으면 모두 중국의 인의를 귀하게 여길 것입니다. 만일 마침내 그 은혜를 입어 직위를 회복하면 반드시 신하를 자청하며 복종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덕을 융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한선제가 이를 좇았다.
한선제 오봉 3년 (BC 55)
1
- 봄 정월 26일, 박양정후 병길이 훙거했다. 반고가 <<한서>>에서 찬했다. “고대에 사물의 명칭을 정할 때는 반드시 비슷한 사물에서 이름을 찾았다. 멀리는 여러 물건에서 취하고, 가까이는 몸에서 취했다. 경전에서 군주는 원수, 신하는 고굉에 비유했다. 일체가 되어 상대함으로써 완성이 되는 것을 밝힌 것이다. 그게 바로 군신상배이다. 이는 고금의 상도로 자연지세이기도 하다. 가까운 한나라의 재상들을 보면 한고제 유방이 그 기틀을 열었다. 소하와 조참이 으뜸이고, 한선제의 중흥으로 병길과 위상이 명성을 얻었다. 그들이 재직할 때 승진과 좌천에 질서가 있었고, 여러 직책은 알맞게 다스려지는 모습을 보였으며, 공경은 대부분 그 자리에 걸맞게 일을 처리해 해내가 예양의 기풍을 흥기시켰다. 그들이 행한 것을 보면 어찌 헛된 것일 리 있겠는가!”
한선제 감로 원년 (BC 53)
3
- 황태자는 부드럽고 어진 성품으로 유가를 좋아했다. 그는 한선제가 발탁한 사람들 대다수가 법령에 밝은 문법리이고, 늘 형법을 이용해 백성을 얽어매는 현실을 목도하게 됐다. 이내 한선제와 함께 연회를 하는 자리를 이용해 조용히 건의했다. “폐하는 형법에 기대는 것이 너무 깊습니다. 마땅히 유생을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 한선제가 안색을 붉히며 화를 냈다. “한나라는 예로부터 스스로 일정한 제도를 가지고 있어, 본래 패도와 왕도를 섞어 사용했다. 어찌 순수하게 왕도에만 의지해 주나라의 정사를 채옹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속유는 시의에 통달하지 못한 까닭에 옛날은 옳고 지금은 그르다는 논리를 좋아한다. 저들은 사람들이 명분과 실리를 섞어 쓰는 이치를 헷갈리게 만들고, 지켜야 할 바가 무엇인지 모른다. 어찌 저들에게 정사를 맡길 수 있겠는가?” 그러고는 이내 탄식했다. “우리 한나라를 어지럽힐 자는 태자이다.!”
- 신 사마광은 평한다. “왕도와 패도는 서로 다른 치도가 아니다. 옛날 삼대가 융성할 때 예약과 정벌 모두 천자로부터 나왔다. 이를 왕자라고 한다. 천자가 미약해 제후들을 잘 다스리지 못하자 제후들 가운데 여국(동맹국)을 이끌고 함께 왕실을 존중하지 않는 자를 토벌한 자를 패자라고 한다. 왕자와 패자가 왕도 내지 패도를 시행하는 것은 모두 인의에 뿌리를 두고, 어질고 능력있는 자를 임용하고, 선악에 대해 상과 벌을 내리며, 포악을 금하고 혼란을 주벌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이는 결코 백흑과 감고처럼 상반된 게 아니다. 한나라가 삼대처럼 다스려지는 시대를 회복하지 못한 것은 인주가 그리하지 않은 탓이다. 결코 선왕의 도가 후대에 다시 시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무릇 유자에는 군자유도 있고, 소인유도 있다. 한선제가 언급한 저들 속유는 진실로 더불어 정사를 하기에 부족한 자들이다. 한선제는 단지 진유를 찾아내 임용하는게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인가? 후직과 설, 고요, 백익, 이윤, 주공, 공자 모두 대유이다. 한나라가 이런 사람을 찾아내 임용했다면 뛰어난 공적이 어찌 이 정도에 그쳤겠는가! (…)”
한선제 황룡 원년 (BC 49)
4
- 겨울 12월 7일, 한선제가 미앙궁에서 붕어했다. 반고가 이같이 찬했다. “한선제의 정사는 신상필벌에 기초해 있었다. 종핵명실(명분과 실리를 종합해 검토하는 것)을 행함으로써 정사지사와 문학지사 및 법리지사 모두 그 능력이 당대의 정영에 해당했다. 특히 기교와 공장 및 기계 분야의 경우는 한원제와 한성제 연간 이후부터는 따라서 만들 수 있는 사람이 극히 적었다. 이를 통해 당시 관원들이 충성을 다해 수직하게 된 배경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백성들이 편안히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던 이유다. 이후 흉노가 괴란의 모습을 보이자 질지 선우를 패망으로 밀어 넣으면서 호한야 선우의 존립 기반을 튼튼히 해 주는 추망고존을 통해 이적에게 위엄을 보였다. 선우가 의를 사모하며 머리를 숙이고 번신을 칭한 이유다. 그 공로가 조종을 빛냈고, 그 업적이 후사의 모범이 됐다. 한나라의 중흥이라고 이를 만하고, 그 공덕은 은나라의 고종 및 주나라의 선황에 비길 만하다!”
- 12월 26일, 태자 유석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권 28
한기 20 우유부단하게 다스리다
한원제 초원 원년 (BC 48)
4
- (역자주: 중상시가 이때 처음 등장했다. 허가가 효시이다. 이들은 황제의 침실까지 출입할 수 있었다. 한성제 때 역사가 반고의 백조부인 반백과 조부인 반치가 중상시로 있었다. 정원이 없었다가 후한의 한명제 때 네 명으로 정해졌고, 한장제와 한화제 때 정중과 채륜 등 환관인 소황문이 중상시가 됐다. 어린 한안제의 즉위로 화제의 등황후가 임조청정을 하면서 중상시는 모두 환관으로 충원됐다. 이후 정원도 네 명에서 열 명으로 늘어나 후한 말기에 이르러 대권을 쥐고 천하를 휘두르는 일이 빚어졌다.)
한원제 초원 2년 (BC 47)
9
- (황제가 소중히 여기고 의지하는 예전 황제의 사부였던 소망지에 대해 석현 등이 모함을 했는데 결국 황제가 그 논리에 동의해 소망지가 감옥에 가게 되었다. 소망지는 구차하다 생각해 짐주를 마시고 자살했다. 이 소식을 들은 천자는 크게 후회하며 식사도 하지 않고 슬피 울었다. 곧 석현 등을 불러 문책했는데 관을 벗고 사죄하자 한참 뒤 문책을 그쳤다.) 신 사마광은 평한다. “심하다, 효원제가 군주로서 너무 쉽게 속고 너무 늦게 알아차린 것이! 물론 홍공과 석현이 소망지를 참소할 때 그 간사한 말과 기만하는 계책은 구별하기 쉬운 게 아니었다. 그러나 당초 황상은 소망지가 감옥에 가는 굴욕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의심할 때는 이미 홍공과 석현이 틀림없이 우려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음에도 과연 자살한 뒤였다. 그렇다면 홍공과 석현의 기망은 분명하다. 중지지군(중간 수준의 군주)일지라도 어찌 동요하여 떨쳐 일어나 이들 사악한 신하들을 처벌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효원제는 그리하지 않았다. 비록 눈물을 흘리고 음식을 끊으면서 소망지의 죽음을 아파했으나 끝내는 홍공과 석현을 주살하지 못했고, 겨우 관을 벗고 사죄를 하도록 만들었을 뿐이다. 이같이 하면 간신들을 어떻게 징계할 수 있겠는가! 이는 홍공과 석현이 그 사악한 마음을 더욱 멋대로 부리게 해 다시는 더 꺼릴 게 없도록 만든 것이다.”
11
- 당초 한무제가 남월을 멸하고 주애군과 담이군을 설치해 바다 가운데 있는 섬에 두었다. (관리자와 현지 백성간에 마찰이 많았고 반란이 잦았다. 그 때마다 병사를 동원해야 했다. 한원제 즉위 후 여러 현이 다시 반기를 들었는데 몇 해 동안 평정하지 못했다.) 황상이 군신들에게 대책을 널리 모의하도록 했다. 크게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고자 한 것이다. 대조 가연지가 말했다. “신이 듣건대 요·순·우가 행한 성덕의 범위는 사방으로 수천 리에 불과했습니다. 이후 서쪽으로 사막, 동쪽으로는 해변, 삭방 남쪽에 이르기까지 모두 중국의 명성과 교화가 행해지게 됐습니다. 이어 성위와 교화를 통해 이르기를, ‘중국의 성교를 좇고자 하면 다스리고, 그렇지 않으면 결코 강압적으로 다스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덕분에 군신은 공덕을 노래하고, 생명 있는 사물 모두 각각 있어야 할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은나라의 중흥 군주인 무정과 주나라의 성황은 은주의 대인입니다. 그러나 영토는 동쪽으로 강(하남성 식현)과 황(하남성 황천현), 서쪽으로 저족과 강족, 남쪽으로 만형, 북으로 삭방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칭송하는 소리가 아울러 일어나고, 보고 듣는 것 모두 그들의 삶을 즐겁게 했으며, 남쪽의 월상씨는 아홉 번의 통역을 거치면서도 공물을 바쳤습니다. 이는 무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진나라 때에 군사를 일으켜 먼 곳을 치고 원정하는 것을 즐겨 안으로 재물을 탕진함으로 인해 천하가 무너지며 반기를 드는 일이 빚어졌습니다. 효문황제가 무력 원정을 포기하고 글(예)로 다스린 이유입니다. 당시 옥송은 수백 건에 불과했고, 부역도 간소하고 가벼웠습니다. 효무황제는 병마를 단련시켜 사방의 이적을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천하의 옥송이 수만 건을 헤아렸고, 부역은 번다한 데다 무거웠습니다. 나아가 도적떼가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군려(군대)가 누차 동원되면서 아비가 앞에서 싸우다 죽는 사이 자식은 뒤에서 싸우다 다치고, 전선을 지킬 사람이 없어 여인이 정장(방어 시설의 하나)에 올라갔으며, 부모 잃은 아이가 길에서 울부짖고, 늙은 부모와 과부는 눈물을 삼키며 골목에서 통곡했습니다. 모두 영토가 너무 크고, 정벌이 쉬지 않고 빚어진 탓입니다. 지금 관동의 백성은 오랫동안 곤경을 당해 길에 흩어져 떠돌고 있습니다. 인정은 부모보다 더 친한 게 없고, 부부의 정보다 더 즐거운 게 없습니다. 아내를 다른 곳에 시집보내고 자식을 파는 상황이 됐는데도 법으로 금할 수 없고, 의로 중지시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사직(나라)의 우환입니다. 지금 폐하는 차마 한때의 노여움을 참지 못하고, 백성들을 큰 바다 한가운데로 몰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이는 유명의 보잘것 없는 섬으로 들어가 마음을 통쾌하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기근을 구제하고 백성을 보전하는 계책이 아닙니다. (…)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문명국인 중원의 관대지국 범위가 아니고, <<서경>><우공>과 <<춘추>>에서 과거 다스렸던 나라로 언급한 곳이 아니면 모두 잠시 상관할 대상이 아니라고 봅니다. 원컨대 마침내 과감히 주애를 버리고, 오직 관동의 기근에 집중해 그 곳 백성들의 어려움을 긍휼히 여기도록 하십시오.”
한원제 초원 5년 (BC 44)
6
- (역자주: 광형은 집안이 가난해 촛불도 살 돈이 없었던 까닭에 벽을 뚫어 이웃집 촛불의 빛을 빌려 책을 읽었다고 한다. 여기서 ‘벽을 뚫어 촛불의 불빛을 훔칠 정도로 열힘히 공부한다’라는 뜻의 착벽투광 성어가 나왔다.)
한원제 영광 원년 (BC 43)
5
- 가을, 황상이 종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장산성 남성의 편문을 나서 누선에 오르고자 했다. 어사대부 설광덕이 황상의 수례를 잡은 뒤 관을 벗고는 머리를 조아렸다. “반드시 수례에 오른 뒤 다리를 건너가야 합니다.” 황상이 하령했다. “어사대부는 관을 쓰도록 하시오.” 설광덕이 말했다. “폐하가 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신은 스스로 목을 찔러 그 피로 폐하의 수레바퀴를 더렵혀 폐하가 입묘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황상이 기뻐하지 않았다. 선구(어가 앞에서 길을 인도하는 사람)인 광록대부 장맹이 앞으로 나아가서 말했다. “신이 듣건대 군주가 거룩하고 슬기로우면 신하는 자연히 정직하다고 했습니다. 배를 타는 것은 위험하니 다리로 편히 가도록 하십시오. 거룩한 군주는 위험한 배를 타지 않는 법입니다. 어사대부의 말을 들을 만합니다.” 황상이 말했다. “다른 사람을 깨우쳐 주려면 마땅히 이러해야 하지 않는가!”
한원제 영광 2년 (BC 42)
5
- 천하를 다스리는 요체는 결국 백성들이 숭상하는 것을 살피는 데 있습니다. 교화의 시행은 집집마다 찾아가 일일이 사람을 설득하는 게 아닙니다. 현자가 재위하고, 능력 있는 자가 직책을 충실히 수행하며, 조정이 예를 숭상하고, 모든 관료가 서로 공경하고 겸양하며, 도덕의 시행이 안에서 밖으로 퍼져나가면서 가까운 곳부터 이뤄지면 됩니다. 그런 뒤에 백성들은 본받을 바를 알게 되고, 선행으로 옮기는 행보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날로 진전됩니다.
권 29
한기 21 왕소군을 시집보내다
한원제 영광 5년 (BC 39)
5
- 태자소부 광형이 상소했다. ”(…) 본성을 다스리는 길은 반드시 자신에게 남은 장점을 살피면서 부족한 단점을 보강하는 게 요체입니다. 대략 밝게 통달한 인물은 남의 단점을 세심히 살피는 일을 경계하고, 견문이 좁은 인물은 스스로 막히고 가려지는 것을 경계하며, 용맹하고 굳센 인물은 마구 폭발하는 것을 경계하고, 어질고 따뜻한 인물은 우유부단함을 경계해야 합니다. 깊고 조용하며 안정되고 편안한 인물은 느슨히 아여 때를 놓치는 것을 경계하고, 마음이 넓고 호탕한 인물은 사안을 소홀히 하여 망각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
한원제 건소 원년 (BC 38)
5
- 황상이 호권(호랑이 우리)으로 행차해 야수의 박투를 관람할 때 후궁들이 모두 주위에 시좌했다. 이때 곰 한 마리가 문득 우리를 탈출한 뒤 난간을 기어 올라와 전 위로 오르려고 했다. 좌우의 시종과 귀인 및 부첩여 등이 모두 놀라 달아났다. 다만 풍첩여만이 앞으로 나아가 곰을 마주하고 섰다. 이 틈에 좌우에서 곰을 격살했다. 황상이 풍첩여에게 물었다. “인정상 놀라고 무서워하기 마련인데 어찌하여 앞으로 나와 곰과 마주한 것인가?” 풍첩여가 대답했다. “맹수는 사람을 하나 잡으면 그칩니다. 첩은 곰이 어좌에 이를까 걱정해 몸으로 맞선 것입니다.” 황제가 탄식하고 배나 더 중하게 여겼다.
한원제 건소 2년 (BC 37)
4
- 경방이 황제에게 물었다. “주유왕과 주여왕과 같은 군주는 어찌하여 나라를 위태롭게 한 것입니까? (…)” 황상이 대답했다. “군주가 밝지 못한 까닭에 임용한 자들 또한 교활하고 바르지 못했소.” “그들의 교활함을 알고도 채용한 것입니까? 아니면 현명하다고 생각한 것입니까?” “당연히 현명하다고 생각했을 것이오.” “그렇다면 지금 어떻게 그들이 현명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까?” “당시 시국이 혼란하고 군주가 위기에 처한 것으로 알 수 있소.” (…) 경방이 물었다. “춘추시대 당시 처음으로 패업을 이룬 제환공과 진시황의 천하 통일 유업을 이은 이세 황제 역시 일찍이 주유왕과 주여왕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비웃음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환공과 이세 황제 모두 간신인 수조와 조고를 신임했습니다. 당시 정사가 날로 어지러워지고, 도적이 산과 들에 가득 차게 된 이유입니다. 어찌하여 주유왕과 주여왕의 전례를 토대로 이를 점쳐서 깨닫지 못한 것입니까?” “오직 도를 지닌 자만이 지난 것을 가지고 앞으로 올 일을 알 수 있을 뿐이오.” 경방이 관을 벗고 머리를 조아리며 물었다. ”(…) 폐하가 보기에 지금 잘 다스려지는 것입니까? 아니면 혼란스런 것입니까?” 황상이 대답했다. “지금 난세의 극에 달했을 뿐인데 오히려 무엇을 묻고자 하는 것이오!” “지금 폐하가 국사를 떠맡겨 쓰고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 “무릇 이전 시대의 군주 역시 그러했습니다. 신은 후대 사람들이 오늘의 정황을 돌아보면서 지금 사람들이 이전 시대를 바라보는 것과 같을까 두렵습니다!” (…) “지금 나라를 어지럽히는 자가 누구요?” (…) “황상이 가장 신임하고, 휘장 속에서 일을 도모하고, 천하의 선비들을 진퇴하게 만드는 자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석현을 지적해서 말한 것)” (…) “나도 알고 있오.” 경방이 황상의 말을 믿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이후 황상은 석현을 결코 물리치지 못했다.
- 신 사마광은 평한다. “군주의 덕이 밝지 못하면 신하가 비록 충성을 다하고자 해도 어찌 절로 받아들여지게 만들 수 있겠는가! 경방이 한원제를 깨닫게 만들고자 한 것을 보면 나름 밝고 지극한 충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원제는 끝내 깨닫지 못했으니 슬픈 일이다! (…)”
한원제 경녕 원년 (BC 33)
7
- 여름 5월 24일, 한원제가 미앙궁에서 붕어했다.
- 반표가 <한서>에서 찬했다. “나의 외조부 금창의 형제는 한원제 때 시중으로 있었다. 나에게 말하기를, ‘한원제는 재예가 많고, (…) 또 음악에 조예가 깊어 금슬을 타고, 퉁소를 불었다. 스스로 곡을 만들고, 노래도 잘 불렀으며, 특히 박자를 미세한 단위까지 맞추는 모습을 보였다. 매우 들을 만했던 이유다. 어렸을 때 유학을 좋아했고, (…) 그러나 황상은 문의에 지나치게 얽매인 나머지 우유부단했다. 한선제 때의 대업이 쇠퇴한 이유다. 그러나 관대한 자세로 아랫사람을 극진히 대했고, 언행이 공손하고 검소했다. 호령이 온화하여 옛날 제왕의 풍도와 지조가 있었다.”
9
- 6월 22일, 태자 유오가 황제의 자리로 나아갔다.
10
- 가을 7월 19일, 한원제를 장안 북쪽의 위릉에 장사 지냈다.
권 30
한기 22 왕씨 외척이 발호하다
한성제 건시 원년 (BC 32)
2
- 석현은 자신을 굳게 지지한 한원제의 죽음으로 이미 의지할 곳을 잃고, 권력으로부터도 멀어졌다. (…) 석현과 그의 처자는 고향인 제남으로 옮겨져 귀향하게 됐다. 석현은 근심과 걱정으로 밥을 먹지 못하다가 길에서 죽고 말았다.
한성제 건시 2년 (BC 31)
5
- (역주) 제질: 제질의 제는 한 남자에게 함께 시집을 간 자매의 여동생, 질은 한 남자에게 시집을 간 형제의 딸을 지칭한다.
한성제 건시 4년 (BC 29)
3
- 3월 8일, 좌장군인 낙창후 왕상을 승상으로 삼았다.
9
- 남산의 군도인 붕종 등 수백 명이 이민에게 해를 끼쳤다. 조서를 내려 병사 1000명을 동원해 뒤쫓아 잡아들이게 했으나 1년여가 지나도 록 잡지 못했다. (… 왕봉이 전 고릉 현령 왕존을 천거해서 …) 한 달 사이에 도적을 말끔히 소탕하자 정식으로 경조윤에 임명했다.
한성제 하평 원년 (BC 28)
4
- 조서를 내렸다. “지금 대벽(사형)의 형은 1000여 조목이나 되고, 율령 또한 번다해 100여만 자나 된다. (…) 스스로 훤히 법을 익힌 자도 그 유래를 잘 모르는 터에 백성에게 이를 깨우치고자 할 경우 이 역시 어렵지 않겠는가! 이런 율령으로 선량한 백성을 그룸질하고, 무고한 자를 요절하게 하니 이 어찌 애통한 일이 아니겠는가! 사형의 죄목을 줄이고, 시의에 부합하지 않는 법을 없애거나 간소화하는 방안을 상의해 누구나 법조문을 쉽고 명백히 알 수 있도록 만들라.”
한성제 하평 2년 (BC 27)
4
- 6월, 황상이 여러 왕씨 외숙을 제후에 봉했다. 왕담을 평아후, 왕상을 성도후, 왕립을 홍양후, 왕근을 곡양후, 왕봉시를 고평후로 삼았다. 이들 5인을 같은 날에 책봉하니, 세상에서 이들을 두고 ‘5후’라고 불렀다.
한성제 하평 3년 (BC 26)
5
- 유향은 왕씨의 권위가 너무 강성하고, 황상이 바야흐로 <<시경>>과 <<서경>> 등의 고문에 관심을 갖자 이내 <<서경>><주서 / 홍범>을 통해 상고 이후 춘추 / 육국 시대를 거쳐 진한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서 및 재이의 기록을 모은 뒤 진행된 상황을 추적하고, 잇따른 화복을 덧붙이고, 점복이 들어맞은 사례를 드러낸 뒤 비슷한 것을 함께 늘어놓고, 각각의 조목을 만들었다. 모두 열한 편에 달했다. 명칭을 <흥범오행전론>으로 지어 상주했다. 천자가 내심 유향의 충정을 알고는 왕봉 형제의 권위가 너무 강성한 것을 우려해 이를 읽도록 권했다. 그러나 종내 왕씨의 권위를 빼앗지는 못했다.
한성제 양삭 원년 (BC 24)
3
- 당시 대장군 왕봉이 일을 맡아 처리했고, 황상은 겸양하는 모습으로 자기 뜻대로 하는 바가 없었다. (…) 두흠은 왕봉의 전정이 너무 무겁다고 생각해 이같이 경계했다. “원컨대 장군은 주성황을 보필한 주공의 겸손하고 두려워하는 자세를 본받고, 진소양왕 초기에 권력을 휘두르다 쫓겨난 양후 위염의 위엄을 덜어 내며, 진소양왕 말기에 활약하다가 자진한 무안군 백기의 욕심을 버리고, 진소양왕 때처럼 응후 범수의 무리가 중간에 끼어들어 위염과 백기를 쫓아내는 식으로 힘을 행사하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왕봉이 듣지 않았다.
한성제 양삭 2년 (BC 23)
3
- (유향이 왕씨 외척을 멀리 내쳐 정사에 개입하지 못하게 하고, 모두 파직시켜 집으로 돌아가게 해야 오히려 외척을 두텁게 안정시키고, 그 종족을 온전히 할 수 있다. 이것이 진실로 왕씨가 영원히 작록을 보유하고, 유씨는 오랫동안 평안하여 사직을 잃지 않게 되는 계책이라고 상서하자.) 천자가 유향을 불러 보았다. 유향이 탄식하며 비통해하는 심경을 이해하며 말했다. “그대는 잠시 더 말하지 않도록 하시오. 내가 장차 해법을 강구해 보도록 하겠소.” 그러나 끝내 유향의 건의를 채택하지 못했다.
권 31
한기 23 왕망이 흑심을 품다
한성제 양삭 3년 (BC 22)
3
- 왕봉이 죽기 전에 이르자 상소를 올려 황상에게 사의를 표한 뒤 다시 왕음을 천거해 자신을 대신하도록 하면서 왕담 등 다섯 명은 반드시 쓸 수 없다고 말했다.
- 8월 24일, 왕봉이 죽었다.
- 9월 2일, 황상이 왕음을 대사마/거기장군으로 삼았다. 이어 왕담을 삼공 다음의 자리인 특진에 앉히면서 장안의 열두 개 성문을 총괄하는 영성문병의 자리를 맡게 했다.
한성제 홍가 3년 (BC 18)
5
- (번희 관련 역주: 하루는 초장왕이 저녁 늦게까지 영윤 우구와 정사를 돌보다가 돌아왔다. 번희가 말하기를, “우구는 현자가 아닌 듯 합니다. 신하 된 자가 군주를 받들어 모시는 방법은 마치 부인이 그 남편을 모시듯이 해야 합니다. 첩은 11년 동안 중궁의 일을 주재하면서 궁중의 아름다운 여인을 대왕에게 천거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오늘 우구는 10여 년 동안 영윤으로 있으면서 현인을 단 한 명도 천거했다는 소리를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무릇 한 사람의 지혜는 유한한 것이며 우리 초나라의 인재는 무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구는 자기 한 사람의 지혜로써 우리 초나라의 무궁한 재사들의 지혜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어찌 그를 현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나온 성어가 번희진간이다.)
한성제 홍가 4년 (BC 17)
1
- (황하가 범람해 관정과 민사 4만여 곳이 무너지자) 평릉 출신 이심 등이 상서하여 건의했다. ”(…) 지금은 둑이 터진 곳을 좇아가면서 잠시 막지 않은 채로 물이 흘러가는 형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황하의 물이 머물고자 하는 곳에는 틀림없이 조금씩 스스로 물길을 만들고, 사토를 옮겨 올 것입니다. 연후에 천심을 따라 도모하면 반드시 성공을 거두고, 재력의 소모도 줄어들 것입니다.”
한성제 영시 원년 (BC 16)
3
- (태후의 여덟 형제 중 일찍 죽은 동생 왕만의 아들이 왕망이다.)
- 왕망은 부친 왕만의 요절로 유고한 까닭에 부귀가 같은 또래의 사촌형제 등의 군형제에 미치지 못했다. 그들 모두 장군 또는 오후의 아들이어서 어릴 때부터 매우 사치스러웠다. (…) 왕망은 절개를 꺾고 공검한 자세로 옷을 유생처럼 입고 근면히 두루 공부했다. 모친은 물론 친형인 왕영의 요절로 과부가 된 형수를 섬기면서 부친을 잃은 조카 왕광을 양육했다. 모두 삼가며 정성을 다했다. 또 밖으로는 영준과 사귀는 외교를 하고, 안으로는 여러 백숙을 공손히 섬겼다. 몸을 굽혀 섬기는 위곡에 성의를 보이는 예의가 있었다.
- 5월 6일, 왕망을 신도후에 봉한 뒤 이내 기도위, 광록대부, 시중으로 승진시켰다. (…) 작위가 높아지자 절개와 지조가 더욱 겸손했다.
- 일찍이 왕망이 사적으로 시비를 사들인 적이 있다. 곤제들이 이 얘기를 전해 듣게 되자 왕망이 자가 자원인 후장군 주박을 언급하며 변명했다. “후장군 자자원에게 아들이 없소. 내가 들으니 이 여인은 의당 아들을 잘 낳는다고 해 사들인 것이오.” 그날로 시비를 주박에게 바쳤다. 그가 속셈을 숨기고 명성을 구하는 게 이와 같았다!
5
- (능묘 조성에 국력이 소모되는 것을 중단하라는 조서에서) ”(…) 무릇 공자는 <<논어>><위령공>에서 허물이 있고도 고치지 않는 것 자체가 바로 허물이라는 취지의 ‘과이불개, 시위과의’를 언급한 바 있다. 창릉을 철폐해 원래의 초릉에 능묘를 조성함으로써 백성의 이주를 금해 천하로 하여금 동요하는 마음을 갖지 않게 하라.”
권 32
한기 24 천재지변이 잇따르다
한성제 원연 원년 (BC 12)
9
- (괴리 현령인 주운이 상서해 알현을 청해해서 황상의 사부인 안창후 장우를 죽여야 한다고 하자 황상이 대로했다. 주운이 끌려 나가는 와중에 부러진 난간을 후에 고치려 하자 황상이 말했다.) “그 난간은 바꾸지 말고 그대로 수습해 원래대로 짜 맞춰 놓도록 하라. 직신을 표창하는 정으로 삼을 것이다.”
한성제 원연 4년 (BC 9)
2
- 한성제의 동생과 조카인 중산왕 유흥과 정도왕 유흔이 모두 내조했다. 중산왕 유흥은 태부 한 명만 대동했고, 정도왕 유흔은 태부, 상, 중위를 대동했다. 황상이 괴이하게 생각해 정도왕 유흔에게 묻자 이같이 대답했다. “법령에 따르면 제후왕은 조현할 때 그 나라의 이천석을 따르게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태부, 상, 중위 모두 나라의 이천석입니다. 빠짐없이 저를 따르게 한 이유입니다.” 황상이 <<시경>>을 암송하게 하자 거침없이 암송할 뿐만 아니라 그 뜻까지 풀이했다. 다른 날 중산왕 유흥에게 물었다. “오직 태부만 따르게 한 규정은 어떤 법령에 있는 것이오?” 능히 대답하지 못했다. 다시 <<상서>>를 암송하게 하자 또 못했다. 식사를 내리자 다른 사람이 모두 끝난 이후에도 계속 식사하며 포식한 뒤 그쳤다. 일어나 걸어 나가는 와중에 버선 끈이 풀렸다. 황상은 이를 통해 중산왕 유흥의 무능을 알아챘다. 정도왕 유흔을 현명하다고 생각해 그의 재주를 자주 칭찬했다. 이 때 제후왕 가운데 오직 중산왕 유흥과 정도왕 유흔 두 명만 황상의 지친에 해당했다. (…) 당시 정도왕 유흔의 나이는 17세였다.
한성제 수화 원년 (BC 8)
2
- 2월 9일, 조서를 내려 정도왕 유흔을 황태자로 삼았다.
10
- 11월 26일, 왕망을 대사마로 임명했다. 당시 그이 나이 38세였다. 왕망은 이미 같은 항렬 가운데 가장 높게 발탁돼 왕봉, 왕음, 왕상, 왕근 등 모두 네 명의 백부와 숙부의 뒤를 이어 보정을 맡게 된 것이다. 그는 내심 자신의 명성을 백부와 숙부보다 뛰어나게 만들 요량으로 마침내 극도로 절제하며 전혀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12
- 유향은 스스로 황상의 신임을 얻었다고 보고 늘 유씨 종실을 드러내 놓고 대변하면서 외척인 왕씨와 고위직에 있는 대신들을 기롱하며 풍자했다. 그 언사가 매우 통절했고, 모두 지성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황상이 자주 유향을 등용해 구경으로 삼으려 했으나 번번이 고위직에 있는 왕씨를 비롯해 승상, 어사대부 등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유향은 끝내 더 이상 승진하지 못한 채 열대부의 위치에서 앞뒤로 30여 년 동안 관직에 있다가 죽었다. 이후 13년 동안 왕망이 한나라를 대신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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