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통감 8
사마광 저, 신동준 역, 올재
권 57, 한기 49 황제가 관직을 팔다
한영제 희평 6년 (177)
15
- (조포가 모친과 처자를 인질로 잡고 있는 선비족을 모두 소탕했고 모친과 처자는 선비족으로부터 죽임을 당했다.) 황제가 사람을 보내 조문하고 그를 유후로 삼았다. 조포가 장례를 마친 뒤 사람들에게 말했다. “국가의 녹을 먹는 자가 재난을 피하면 충신이 아니고 모친을 죽여 대의를 살리는 것은 효자가 아니다. 상황이 이러한데 내가 무슨 면목으로 세상을 살 수 있겠는가?” 조포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한영제 광화 원년 (178)
21
- 이해에 서저에서 매관매직하는 것을 윤허하자 2000석의 관직은 2000만 전, 400석의 관직은 400만 전에 팔렸다. (…) 황제가 측근을 통해 은밀히 공경의 자리도 팔았다.
권 58, 한기 50 황건의 난이 일어나다
한영제 광화 6년 (183)
6
- 당초 거록 출신 장각은 황로도를 믿었다. (…) 장각이 신도들을 각지로 파견해 사방을 돌아다니며 전도하게 하자 10여 년 사이에 신도가 수십만이나 됐다. (…) 재산을 팔아 같이 떠도는 자들도 있어 이들로 인해 길이 가득 메워지게 됐다. 이들을 뒤쫓지 못해 도중에 사망한 자도 1만 명 가까이나 됐다.
- (역자주) 황로도 : 후한 말에 성행한 황제와 노자를 교주로 삼는 종교를 말한다. 장각은 스스로 ‘대현량사’를 일컬으며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을 흔히 황건적이라고 부르게 됐다. 이들의 봉기는 후한의 멸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황로도는 후대에 도교로 발전하게 됐다.
- (장각의 신도들이 이런 요언을 퍼뜨렸다.) “창천(한나라)은 이미 죽고 황천(장각)이 대신하니 갑자년(영제 중평 원년, 184년)이 되면 천하가 대길할 것이다!”
한영제 중평 원년 (184)
1
- 장각 등이 거사 음모가 누설된 것을 알고 사자에게 명해 밤낮으로 달려가 모든 방이 일제히 황건을 두르고 거병할 것을 통보하게 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황건적’이라고 불렀다.
7
- 조조의 부친은 조승이다. 조조는 중상시 조등의 양자로 그의 출생 및 생애에 관해서는 소상히 알 길이 없다. 어떤 자는 그가 하우씨의 자손이라고 했다.
-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기민하며 임기응변이 있었다. 의협의 협기가 있고 호탕했다. 생계를 위한 직업에는 종사하지 않았다.
- 당시 사람들은 그의 기재를 알아보지 못했다. 단지 태위 교현과 남양인 하옹만이 그의 비범함을 알아챘다. (하옹을 통해 당시의 인물들에 대해 품평하는 것을 즐기는 허소를 소개받고 조조가 허소에게 물었다.) “나는 어떤 사람이오?” 허소가 그의 사람됨을 낮게 보고 대답하지 않았다. 조조가 그에게 대답을 강요하자 말했다. “당신은 치세의 능신이고 난세의 간웅이오.” 조조가 크게 기뻐하며 돌아갔다.
14
- 겨울 10월, 황보숭이 (…) 장량의 목을 포함해 3만 명의 수급을 얻었다.
권 59, 한기 51 동탁이 황제를 폐립하다
한영제 중평 6년 (189)
6
- (황제에게는 하황후가 낳은 유변과 왕미인이 낳은 유협 두 아들이 있었는데 태자로 내심 유협을 생각하고 있었다.)
- 4월 11일, 황제가 가덕전에서 붕했다.
- 4월 13일, 황자 유변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나이는 열네 살이었다. 하황후가 황태후가 돼 임조청정했다.
11
- (천하의 병권은 황보승과 동탁에게 있었는데 둘은 사이가 안 좋았다. 황보승이 동탁을 쳐서 제거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 (하진은 환관을 모두 제거하고자 했는데 우유부단하게 진행을 잘 하지 못했다. 조조는 이를 간파하고 실패할 것을 예견했다.)
- (동탁은 변방으로 가라는 황제의 명령도 거부하고 황보승에게 군사를 넘기라는 명령도 거부하고 있었다.)
- (하진이 환관 제거에 이용하기 위해 동탁을 경성으로 불렀다. 이 와중에 계획이 누설되어 하진은 환관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 (이 혼란 속에서 원소가 환관 2000명을 제거했다.)
- (황제는 도망갔다 민공 등에게 구조되어 민가에서 덮개도 없는 수례를 얻어 환궁할 생각으로 남쪽으로 갔다.)
- (동탁이 이 틈을 노려 황제를 맞이하고 궁 내를 장악했다.)
12
- (동탁이 원소에게 황제 폐위의 뜻을 전하자 원소가 반대했고, 원소는 사례교위 부절을 놓고 기주로 갔다.)
- 9월 1일, 동탁이 태후를 겁박해 만든 폐립 칙령을 발표했다. (…) 원외가 황제의 새수를 풀어 진류왕(새 황제)에게 바친 후 홍농왕(전 황제)을 전 아래로 내려오게 해 칭신하게 했다. 태후가 흐느끼자 군신들 또한 비통해했으나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 동탁이 연호를 소녕에서 영한으로 바꿨다.
- 9월 3일, 동탁이 하태후를 짐살했다.
14
- 9월 12일, 동탁이 스스로 태위•영전장군사가 된 뒤 절전•부월•호본• 등을 하사받고 작호를 미후로 바꿨다.
21
- 11월, 동탁을 상국에 임명하고 배례할 때 성명을 부르지 않는 찬배불명과 입조할 때 잔걸음으로 빨리 가지 않는 입조불추, 검을 차고 신을 신은 채 전에 오르는 검리전상의 특권을 윤허했다.
24
- (동탁이 원소를 체포해 죽이려고 하자 주비와 오경이 원소를 체포하려고 하면 오히려 반기를 들게하고 다른 영웅들이 같이 일어날 것이라 차라리 그를 사면해 1군의 군수로 삼는 것만 못하다고 권했다.) 동탁이 이를 좇아 곧 원소를 사면해 발해 태수로 임명하고 항향후에 봉한 뒤 원술을 후장군, 조조를 효기교위로 삼았다. 그러나 원술은 동탁을 ㄷ 려워해 남양으로 도망갔고, 조조는 이름과 성을 바꾼 뒤 샛길을 따라 동쪽으로 달아났다.
- 조조가 중모를 지날 때 정장이 그를 수상하게 생각해 현부에 잡아 두었다. 당시 현부에는 이미 조조를 잡아 두라는 문서가 접수돼 있었다. 현의 공조는 그가 조조인 것을 알고 난세에 천하웅준을 잡아 둘 수 없다며 현령에게 그를 풀어 줄 것을 건의했다. 조조가 진류에 도착한 뒤 가재를 팔아 5000명의 군사를 모았다.
한헌제 초평 원년 (190)
3
- 1월 계유, 동탁이 낭중령 이유를 보내 홍농왕 유변을 짐살했다.
권 60, 한기 52 난세의 영웅이 출현하다
한헌제 초평 2년 (191)
2
- (산동의 제장들이 황친 가운데 어질고 준수한 유우를 천자로 옹립하기로 의견을 모았는데 조조가 반대하며) “우리가 기병을 하자 원근을 막론하고 호응하지 않는 곳이 없게 된 것은 대의를 좇아 기병했기 때문이오, 지금 유주가 비록 미약해 간신에게 제압당하고 있으나 아직 창읍왕과 같이 망국지혼을 내보인 적이 없소. 하루아침에 폐립이 이뤄지면 천하 사람 가운데 누가 동의하겠소. 제군이 유주의 유우를 세우기 위해 북면하면 나는 장안의 천자를 시봉하기 위해 서향하겠소.”
11
- 당초 탁군의 유비는 중산정왕의 후예로 어렸을 때 부친을 여의고 가세가 빈한해 모친과 함께 신발을 만들어 이를 시장에 내다 팔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의 신장은 7척 5촌인데 두 손을 내리면 무릎에 닿았다. 귀 또한 커서 얼굴을 옆으로 돌리면 자신의 귓바퀴를 볼 수 있었다. 그능 가슴에 큰 뜻을 품어 말수가 적었고 얼굴에 희노애락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 일찍이 공손찬과 함께 노식을 스승으로 모셨던 인연으로 공손찬에게 의탁하게 됐다. 이때 공손찬이 유비와 전해를 보내 청주를 치게 하자 유비가 전공을 세우고 평원상이 됐다.
- 유비는 어렸을 때 이미 하동 출신 관우 및 탁군 출신 장비와 서로 매우 가까운 친구로 지냈다. 유비는 평원상이 되자 관우와 장비를 별부사마로 삼아 각각 부대를 이끌게 했다. 유비와 그들 두 사람은 잠을 잘 때면 같은 침상에서 자 그 은정이 마치 형제와 같았다. 다만 여러 사람이 같이 있을 때는 두 사람 모두 유비의 좌우에서 하루 종일 시립했다. 두 사람은 유비를 따라 남정북전하면서 어떤 어려움과 위험도 결코 피하지 않았다.
- 상산인 조운이 본군의 이속과 군사들을 이끌고 공손찬에게 투항했다. (…) 유비가 조운을 보고 그의 지략이 출중함을 알고 그를 마음속 깊이 받아들였다. 조운이 이내 유비를 좇아 평원으로 가 기병을 통솔하게 됐다.
한헌제 초평 3년 (192)
2
- 순욱은 어릴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 명망이 있었다. 어느 날 하옹이 그를 본 뒤 매우 놀라워했다. “참으로 군왕을 보좌할 만한 인재다.”
- (순욱이 마을 어른들에게 천하가 어지럽고 마을이 적의 침입을 받기 쉬운 곳이라 빨리 피하자고 했는데 아무도 고향을 떠나길 원치 않았다.) 순욱만이 홀로 일족을 이끌고 한복에게 가 몸을 의탁했다. 원소가 한복의 자리를 빼앗은 뒤 상빈의 예로 순욱을 대접했다.
- 순욱은 원소의 그릇을 보고는 그가 결국 대업을 성취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조가 웅지와 지략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곧 원소를 떠나 조조에게 갔다. 조조가 순욱과 얘기를 나눈 뒤 크게 기뻐했다. “이는 나의 장자방이다.”
- 고향에 남아 있던 사럼들은 대다수가 이각과 곽사 등에게 살해됐다.
3
- (공손찬이 원소에게 패했다.)
4
- 동탁이 자신의 동생 동민을 좌장군, 형의 아들 동황을 중군교위로 삼아 병권을 완전히 장악한 데 이어 그의 친인척 모두를 조정의 관원으로 임명했다.
- 중랑장 여포는 궁마에 능할 뿐 아니라 힘이 절륜한 비력과인을 자랑했다. (…) 일찍이 여포가 작은 실수를 저질러 동탁의 뜻을 거스른 적이 있었다. 당시 화가 난 동탁이 작은 창을 뽑아 여포에게 던졌으나 여포가 재빨리 몸을 피해 무사할 수 있었다. 여포가 곧 기쁜 낯으로 동탁에게 잘못을 빌어 겨우 동탁의 노기를 가라앉힐 수 있었으나 여포는 이 일을 계기로 동탁에 대해 내심 원한을 품게 됐다. (…) 여포가 동탁 몰래 동탁의 부비(시첩)와 사통하게 됐다. 여포는 늘 이 사실이 발각될까 마음이 불안해했다.
- 왕윤은 평소 여포를 매우 잘 대해 주었다. (… 왕윤이 동탁 제거에 내응해 달라고 여포에게 부탁하자) 여포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우리는 부자지간이나 다름없는데 어찌 그럴 수 있겠소?” 왕윤이 여포를 부추기며 말했다. “군의 성은 여씨로 동탁과는 본래 골육지친이 아니오. (…) 그가 군에게 창을 던졌을 때 어찌 부자지정이 있다고 할 수 있겠소?” 여포가 마침내 왕윤의 제의를 수락했다.
- 왕윤이 사손서를 시켜 조서를 꾸민 뒤 이를 여포에게 전해 주게 했다. 여포가 고향 사람인 기도위 이숙과 용사 진의, 진위 등 10여 명에게 위사의 옷으로 갈아입고 북액문 안을 지키면서 동탁을 기다리도록 했다. 동탁이 문을 넘어서자 이숙이 곧바로 창을 들어 그를 향해 찔렀다. 동탁은 조복 속에 호심갑을 입고 있어 별다른 상처를 입지 않았다. 이숙이 창을 버리고 곧 칼을 빼 들어 그의 팔을 베자 동탁이 수레에서 굴러 떨어졌다. 동탁이 고개를 돌려 다급한 목소리로 외쳐 댔다. “여포는 어디에 있는가?” 뒤에 숨어 있던 여포가 앞으로 쑥 나서면서 말했다. “적신을 주살하라는 조명이 내렸다!” 동탁이 마구 욕을 해 대며 말했다. “개 같은 자식, 네가 감히 이럴 수 있는가?” 여포가 그의 욕이 끝나기도 전에 창을 들어 그를 찌른 뒤 병사들에게 그의 목을 치게 했다.
- 곧 동탁의 시신이 장안 거리에 내걸렸다. 마침 이때는 더위가 시작하던 때였다. 동탁은 평소 매우 비대해 시신에서 흘러나온 기름이 땅 위에 넘쳐흘렀다. 시신을 지키던 관리들이 커다란 등잔불 심지를 만들어 시신의 배꼽 속에 집어 넣고 불을 붙이자 저녁때부터 타기 시작한 심지 불이 다음 날 동이 틀 무렵까지 꺼지지 않고 계속 탔다. 이런 일이 며칠간 계속됐다.
- 동탁이 죽은 후 왕윤이 녹상서사에 임명됐다. 여포는 분위장군·가절에 임명돼 온후에 봉해지니 모든 의식·대우가 삼공과 같았다. 왕윤과 여포는 함께 조정을 장악해 공동으로 다스렸다.
7
- (이각 등이 동탁의 복수를 위해 장안을 공격하러 이동했다.) 이각이 장안으로 가는 도중에 수시로 병사들을 불러 모으자 장안에 도착할 때는 이미 10여만 명에 달하게 됐다.
- 6월 1일, 여포의 군중에서 촉병들이 반기를 들어 이각의 군사를 성안으로 끌어들이자 이각이 군사들을 풀어 성안을 노략하게 했다. 여포는 이각과 성안에서 시가전을 벌였으나 이기지 못하자 수백 명의 기병을 이끌고 동탁의 머리를 말안장 위에 묶은 채 성 밖으로 달아났다. 여포가 청쇄문 밖에서 잠시 멈춰 왕윤을 불러 같이 도망갈 것을 권하자 왕윤이 거절했다. “사직의 신령이 도와주면 위로 나라를 평안하게 만드는 것이 나의 평소 바람이었소. 만일 실현되지 못하면 나는 목숨을 바칠 뿐이오. 지금 황제가 유충해 오직 나만을 믿고 있으니 위난을 당해 도망가는 짓을 나는 차마 할 수 없소. (…)”
- 6월 7일, 이각이 왕윤·송익·왕굉을 모두 잡아들여 죽인 뒤 왕윤의 처자식도 모두 주륙했다.
- 당초 왕윤은 동탁을 토벌한 공로를 전부 자신에게 돌렸다. 사손서는 공이 있어도 열후에 봉해지지 않은 덕분에 오히려 재난을 피하게 됐다. 신 사마광은 평한다. “<<주역>><겸괘> 효사에 이르기를, ‘공로가 있으면서 겸양하는 군자는 가히 끝이 길하다’라고 했으니 사손서는 공로가 있으면서도 스스로 떠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몸을 보전했으니 가히 그를 지혜롭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권 61, 한기 53 유비가 서주를 얻다
한헌제 흥평 원년 (194)
15
- 여름 4월에서 이달까지 줄곧 비가 오지 않았다. 곡식 한 말 값이 50만 전에 달하자 장안성 내에 사람을 먹는 자가 나타났다. 황제가 시어사 후문에게 명해 태창의 쌀과 콩 등을 내어다 죽을 끓여 빈민에게 나눠 주도록 했으나 아사자의 수는 전과 같았다. 황제가 구제에 문제가 있는가 의심해 친히 쌀과 콩 각 다섯 되를 얻어 직접 면전에서 죽을 끓이도록 독촉해 두 그릇이나 먹었다. 곧 후문에게 곤장 50대를 치자 빈민이 모두 구제됐다.
20
- 서주목 도겸이 병이 위독해 자리에 누운 뒤 별가 동해인 미축에게 유언했다. “유비를 제외하고 누구도 서주를 안정시킬 수 없다.” 도겸이 죽자 미축이 서주의 관민을 이끌고 가 유비를 맞아들였다. 유비가 감히 접수하기를 거부하며 이같이 말했다. “원공로 원술이 가까운 수춘에 있으니 가히 서주를 그에게 줄만 하오.” (…) 유비가 마침내 서주를 관장하였다.
22
- 당초 손견은 전당 출신 오씨를 얻어 손책, 손권, 손익, 손광 등 네 명의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 손책이 불과 10여 세 때에 이미 저명한 인사들과 교결했다.
- 서현 출신인 주유는 손책과 동갑이었다. 매우 총명하며 조숙했다. 그는 손책의 명성을 듣고 서현에서 찾아와 손책을 예방했다. 두 사람이 곧 성심으로 사귀게 돼 주유가 손책에게 서현으로 옮겨 와 살 것을 권하자 손책도 동의했다. (…) 양쪽 집안이 한 가족같이 지내게 됐다.
한헌제 흥평 2년 (195)
7
- (조조가 서주를 공격하려 하자) 순욱이 간했다. “예전에 한고제는 관중을 지켰고 광무제는 하내를 지켰습니다. 모두 근본을 공고히 한 후 천하를 제압한 것입니다. 진격해서는 적을 이기는데 만족했고 물러나서는 견고히 지키는 데 만족했습니다. 그로 인해 비록 어려움과 패배가 있었음에도 끝내 대업을 완성한 것입니다. (…) 무릇 일이란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하는 선택이니 대소 가운데 큰 것을 취하며, 안위 가운데 안녕을 취하고, 근본을 동요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방편 가운데 편법을 취하는 것이 좋습니다. (…)” 조조가 당초의 생각을 포기했다.
- 여포는 조조에게 패해 동쪽으로 도주해 유비에게 갔다. (…) 여포는 처음으로 유비를 본 순간 매우 존경하는 태도로 유비에게 말했다. (…) 유비를 동생으로 불렀다. 유비가 여포의 말에 지나친 점이 있어 겉으로는 비록 응수는 했으나 내심 기분이 좋지 않았다.
10
- 겨울 10월, 조조를 연주목에 임명했다.
12
- 손책은 용모가 매우 출중한 데다 우스갯소리도 하고 활달하며 사람을 쓰는데 뛰어났다. 사대부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그를 본 사람들 가운데 그에게 마음을 다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모두 즐거이 목숨을 바쳐 그의 명령을 따랐다.
15
- (공손찬이 유우를 죽인 후 유주를 차지했지만 백성을 돌보지 않아 원성이 높았다. 유우의 종사인 선우보 등과 유우의 아들 유화와 원소의 부장 국의가 10만 명의 군사로 공손찬을 공격해 대파했다. 공손찬은 세간의 동요에서 세상을 피하기 좋다고 하는 역현으로 가서 높은 누대를 쌓고 쇠대문을 만들고 아이와 처첩만을 그 안에 살게 하고, 보고서는 새끼줄로 올리게 하고 부녀들에게 소리 지르게 해 명령을 전달했다.)
-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묻자 공손찬이 이같이 대답했다. “나는 예전에 요새 밖에서 반란을 일으킨 호인들을 몰아내고 맹진에서 황건적을 쓸어 냈다. 그 때 천하는 쉽게 평정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오늘 돌이켜 보니 전쟁이 방금 일어난 것같이 여겨지고 천하 평정은 내가 능히 결정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군사를 쉬게 해 열심히 경작하며 흉년을 넘기는 것만 못하다. (…)”
권 62, 한기 54 조조가 정적 원소를 치다
한헌제 건안 원년 (196)
12
- 조조가 순욱에게 지모가 있는 인물을 추천하도록 하자 순욱이 자신의 조카 순유와 영천인 곽가를 천거했다. (…) 순유를 군사로 삼았다.
- 곽가는 당초 원소를 만나러 갔었다. 원소가 심히 그를 존중해 예로써 대우했다. 수십 일이 지난 뒤 곽가가 원소의 모신 신평 / 곽도에게 말했다. “무릇 지혜로운 자는 신중하게 자신의 주인을 선택해야만 만사를 온전히 할 수 있고 공명도 세울 수 있다. 원공은 한낱 주공이 현사를 예우한 것만 모방하려 들 뿐 용인의 요체를 모른다. 잡무에 바빠 요점이 없고 계획 세우는 것을 좋아하나 결단을 못 내린다. 그와 함께 천하대란을 구해 패왕의 공업을 이루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
- 조조가 곽가를 불러 천하대사를 의논한 뒤 기뻐했다. (…) 곽가도 조조와 얘기를 나눈 뒤 기뻐했다. (…) 조조가 상표해 곽가를 사공좨주로 천거했다.
14
- 유비가 1만여 명의 군사를 모으자 여포가 불만을 품고 군사를 이끌고 가 유비를 쳤다. 유비가 패주해 조조에게 의탁하자 조조가 그를 후히 대우해 예주목에 임명했다. 어떤 사람이 조조에게 말했다. “유비는 영웅의 기개가 있어 지금 일찍 제거하지 않으면 후에 반드시 화가 될 것입니다.” 조조는 이 일을 곽가에게 묻자 곽가가 말했다. “그렇기는 합니다. (…) 지금 유비는 영웅의 칭호가 있으나 갈 데가 없어 의탁했는데 그를 해치면 현인을 죽였다는 악명을 얻게 됩니다. 이 경우 지사들이 의심을 하고 마음을 돌려 새로운 주인을 찾을 것이니 공은 누구와 더불어 천하를 평정할 것입니까? 장차 화근이 될 한 인물을 제거해 천하 사람의 기대를 저버린다면 이는 존망과 관련된 중대 사안입니다. 잘 헤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조조가 웃으며 말했다. “군의 말이 옳소.”
한헌제 건안 3년 (198)
3
- 12월 24일, (여포가 조조에게 포위되어 가망이 없을 때) 여포가 좌우에 명해 자신의 목을 쳐 조조에게 가져가도록 했으나 좌우의 부하들이 차마 못하자 곧 백문루에서 내려와 투항했다.
- 조조가 (같이 잡힌 예전에 자기 밑에 있던 진궁에게) 물었다. “경의 모친은 어찌할 셈이오.” 진궁이 대답했다. “듣건대 효로써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사람의 양친을 해치지 않는다 했으니 노모의 생사는 명공에게 있지 나에게 있지 않소.” 조조가 물었다. “경의 처자는 어찌할 것이오.” 진궁이 대답했다. “듣건대 천하에 인정을 베푸는 자는 사람의 후사를 끊지 않는다 했으니 처자의 생사는 명공에게 있지 나에게 있는게 아니오.” 조조가 다시 할 말이 없었다. 진궁이 형 받기를 청해 마침내 일어나 나가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자 조조가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 이날 여포 • 고순 등이 모두 교수된 뒤 수급이 허현의 거리에 내걸렸다.
권 63, 한기 55 손권이 부형의 뒤를 잇다
한헌제 건안 4년 (199)
9
- (동승이 유비와 함께 조조를 죽이려하고 한 사실을 알고 유비에게 말했다.) “지금 천하의 영웅은 오직 사군과 나 조조뿐이오. 본초와 같은 자들은 낄 수가 없소.” 유비가 이때 밥을 먹다가 놀라서 손에 들고 있던 수저를 떨어뜨렸다 마침 하늘에서 우렛소리가 들리자 유비가 이를 틈타 변명했다. “공자가 말하기를, ‘빠른 번개와 강풍은 사람의 안색을 변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실로 일리가 있습니다.”
- 당시 조조가 유비와 주령에게 원술을 요격하게 하자 정욱•곽가•동소 등이 모두 조조를 만류했다. “유비를 보내서는 안 됩니다.” 조조가 후회해 그를 추격하게 했으나 이미 미칠 수가 없었다.
- 유비는 서주 자사 거주를 죽인 후 관우를 남겨 두어 하비를 지키면서 태수의 일을 처리하게 하고 자신은 소패로 돌아왔다.
- 동해의 도적 창희와 부근의 군현 대다수가 조조를 배반하고 유비에게 붙었다. (… 조조가 유비를 치려 왕충을 보냈으나 이기지 못했다 …) 유비가 말했다. “너 같은 자 100명을 보내도 나를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설령 조 공이 직접 온다 해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한헌제 건안 5년 (200)
1
- 조조가 유비를 쳐 깨뜨리고 그의 처자를 포로로 잡았다. 또 하비를 공략해 관우를 사로잡은 뒤 창희를 쳐서 격퇴시켰다. 유비가 청주로 도망친 후 원담을 통해 원소에게 의탁했다.
- (조조가 원소의 부하 안량을 칠 때 관우를 선봉에 보냈다.) 관우는 장수가 탄 수레를 표시하며 지휘용으로 쓰는 큰 깃발과 긴 덮개인 안량의 휘개를 보자 곧바로 말을 급히 몰아 그대로 달려들었다. 수많은 적군 속에서 안량의 목을 베어 돌아왔으나 원소의 군사들 가운데 관우를 당할 자가 없었다.
- 당초 조조는 관우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했다. 그가 오래 머물 생각이 없음을 알고 장료를 보내 그 이유를 묻도록 했다. 관우가 탄식했다. “나는 조 공이 나에게 두터이 대우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소. 나는 유 장군의 은덕을 입고 죽더라도 같이 죽기로 맹서해 유 장군을 배반할 수 없소. 내가 끝내 남아 있을 수 없으니 공을 세워 조 공에게 보답한 후 떠나고자 할 뿐이요.” 장료가 관우의 말을 조조에게 보고하자 조조가 그의 의기에 감탄했다. 관우가 안량을 죽이게 되자 조조는 그가 반드시 떠날 것을 알고 그에게 후히 포상했다. 관우는 조조로부터 포상받은 물건을 전부 봉하고 서신을 써 작별을 고한 뒤 원소 군중에 있는 유비에게 갔다. 조조의 좌우 사람들이 쫓아가려고 하자 조조가 만류했다. “각자 그 주인이 있으니 뒤쫓지 마라.”
- (당초 손책이 오군 태수 허공을 죽였는데 사냥 중 허공의 복수를 하고자 하는 문객을 만나 화살을 맞았다.) 손책이 장소 등을 불러 당부했다. “중원이 바야흐로 전란 중이니, 오·월의 백성과 3강의 험고에 의지하면 족히 성패를 관망할 수 있을 것이오. 공들은 나의 동생을 잘 보좌해 주시오.” 이어 손권을 큰 소리로 불러 인수를 채워 주며 유언했다. “나는 강동의 군사를 이끌고 두 진영의 사이에서 전략을 짜고 결정했다. 천하의 영웅들과 승패를 다투는 것은 경이 나만 못하다. 현능한 자를 탁용해 그들로 하여금 충성을 다해 강동을 보위하게 하는 것은 내가 경만 못했다.” 4월 4일, 손책이 세상을 떠났다. 나이 26세였다.
8
- 조조가 손책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를 틈타 정벌하려 하니 시어사 장굉이 막으며 말했다. “사람의 상사를 이용하는 것은 예로부터 의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만일 성공치 못하면 새로운 원수를 만들고 옛날의 우호 관계마저 잃게 됩니다. 이 기회를 이용해 오히려 후대함만 못합니다.”
권 64, 한기 56 조조가 세력을 넓히다
한헌제 건안 7년 (202)
2
- 원소가 관도의 패전 이후 부끄럽고 분한 생각에 병이 나 피를 토했다. 5월, 훙거했다.
4
- 오부인이 말했다. “공근(주유)의 말이 옳다. 공근과 백부(손책)는 동년으로 단지 한 달이 적을 뿐이다. 나는 그를 자식처럼 대하고 있다. 너는 공근을 형처럼 모셔야 한다.”
한헌제 건안 9년 (204)
2
- 당초 원소와 조조가 함께 기병했을 때 원소가 조조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만일 사정이 여의치 못하면 어느 쪽이 가히 점거할 만하오?” 조조가 오히려 반문했다 “족하는 어찌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까?” 원소가 대답했다. “나는 남으로 황하를 점거하고 북으로 연과 대에 의지해 북쪽 오랑캐를 군사로 불러들여 남쪽으로 내려가 쟁천하를 하겠소. 대개 그러면 거의 성공할 것이오.” 조조가 응답했다. “나는 천하의 지모와 역량을 사용해 도를 가지고 그들을 제어하겠소. 어느 곳이든 모두 가하오!”
- 9월, 조령으로 조조를 기주목으로 임명했다. (…) 조조가 (…) 신이 나서 말했다. “어제 내가 호적을 살펴보니 가히 30만 명의 군사를 얻을 수 있겠다. 그래서 기주를 대주라고 하는 모양이다.” 최염이 반박했다. “지금 구주가 분열된 데다 두 원씨 형제가 싸우니 기주 백성들의 시체가 들판에 널려 있으나 천자의 군사가 백성들의 이런 고통을 염려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백성을 극단의 곤경에서 구출해야 하는데 오히려 병사의 숫자를 세어 이를 우선으로 삼으니 우리 기주의 백성들이 명공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조조가 태도를 바꿔 최담에게 사죄했다.
7
- 단양군의 대도독 규람과 군승 대원이 단양 태수 손익을 죽였다. (…) 규람이 손익의 처 서씨를 강요해 자신에게 시집오도록 하자 서씨가 그를 속였다. “이달 그뭄에 주인의 제사를 지내고 상복을 벗을 때까지 기다려 주면 이후 명을 받들겠습니다.” 규람이 동의하자 서씨가 몰래 서신을 써 사자를 통해 손익과 가까웠던 옛 제장 손고/부영 등에게 보내 규람을 함께 제거할 것을 제의했다. (…) 그믐이 돼 제사상을 차려 놓고 서씨가 통곡해 애도하면서 제사를 끝낸 뒤 상복을 벗고 유향의 연기로 목욕하고 즐거이 웃으며 담소했다. (…) 규람이 서씨의 이런 모습을 몰래 훔쳐보고 다시는 의심치 않았다. 서씨가 손고/부영을 방안에 매복하게 한 뒤 사람을 보내 규람을 불렀다. (…) 손고/부영이 일제히 뛰쳐나와 규람을 죽이고 다른 사람들은 즉각 밖으로 나가 대원을 죽였다. 서씨가 새로이 상복을 갈아입은 뒤 위람/대원의 수급을 들고 손익의 묘 앞에서 제사를 지냈다. 전군이 이 얘기를 듣고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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